2017년 3월 26일 일요일

자유를 찾아서

                                     자유를 찾아서
                                 부제 - 인간 자유에 대하여

                                 


도를 궁구하고 깨닫고 찾던 중, 그간 깨달은 것을 세상에 보이고 도의 길은 끝이 없으니 모든 사람이 도통하기를.






                                 차     례
1. 나는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
2. 인간 모두가 실수하지 않고 살 순 없을까.
3. 나는 왜 여기에 있나? 인간은 무엇인가?
4. 나를 있게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나’ 로 나타난 ‘결과’ 는?
5. 내가 여기 있게된게 이미 정해진 것인가? ‘팔자’ 일까?
6. 그래봤자 결국 인간 입장으로 생각하는 거잖아? 실체는 다를 수 있지 않나?
7. 그럼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이렇게 있는 “실존” 에 대해서는.
8. 그럼 인간이 “실존”을 하는걸 알았고, 그런 “실존하는 인간” 이 왜 자유가 없다고 느끼거나,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 논쟁이 되는가? 단지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 선천적으로 아는 “선지” 가 없어서 인가. 왜 모든 자가 공평하게 그런 자유를 깨닫고 쓰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가.
9. 그럼 인간은 “자유” 가 있는가? 그걸 쓰는 방법은.
10. 그럼 “자유” 는 인과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되어 존재할 수 있는가.
11. 그럼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12.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고 하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럼 계속해서 지금도 흐르고 있는 시간으로 인해서 모순이 발생하는 문제는 어떻게 하는가?
13. 그러면 미래를 다룰 수 있게 되는가? 그리고 이것의 효과는?
14. 그러면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었던 “초기에 실수를 하는 문제” 의 실체와 그것의 해결방안은 무엇인가.
15. 그러면 그런식으로 불공평하게 시공간 특성의 “인과” 혹은 “계기” 나 선천적 결함으로 인해 “자유의지”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상황의 사람들이 처벌이나 고난을 받는 것은 부당한 점이 있다.
16. 그럼 성서의 사례는.
17. 이런 작동적인 측면 말고 인문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하면 어떤가.
18. 지금까지 했던 것을 구조적인 측면에서 간략하게 정리를 해본다면.
19. 마무리 하며 ? 이건 국가 차원의 일
20. 끝맺음.

1. 나는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
 사람이면 누구나 '아 그때 왜 그랬지... 실수다.' 그런 때가 있다. 그런데 그런 '어쩔 수 없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나 '지나고 나니 후회하는' 그런 순간에 대해 해석하고 그걸 방지하고자 하는 책이다.

2. 인간 모두가 실수하지 않고 살 순 없을까.
 인간이 실수하는게 코미디의 재료로 이용되거나, 일상에서 웃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웃지 못할 그런 실수들이 있다. 그것은 철학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 에 관한 문제와 직결된다. 인간 자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자유를 가질 수 있는가 등...
 일단 이것을 해석하고 방지하고 이런 노하우를 개인이 활용하고 성공하고 후대에 까지 유전화처럼 전수하려면, 이것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3. 나는 왜 여기에 있나? 인간은 무엇인가?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인과” (원인과 결과) 에 의해서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에 의해 아기로 태어났다. 그리고 독립된 개체로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곳, 지구라는 곳에서 인간이 개념화한 “자유의지” 라는 것으로 “지각” 즉, 듣고 보고 느끼고 인식하고 생각하고 다양한 행위를 한다.

4. 나를 있게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나’ 로 나타난 ‘결과’ 는?
 인과란 무엇일까? 자유의지의 실체는 무엇일까?를 철학적으로 탐구해 보아도 좋다. 그러나 탐구해도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많지 않고, 또 그것이 활용가능한 일상적 기술로써 많이 전수되지 않고 퍼지지 않았다. 철학은 인간이 사용함으로써 빛을 발한다. 보통은 일상적으로 경험한 지각과 자유의지의 선에서 처리하고 실수의 리스크가 크지 않아 그렇게 문제 삼지 않는 경우가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수의 리스크가 크다면, 그리고 시공간 내에서 살아있는 동안 원하는 것을 모두 하고 원하는 수준을 얻고 싶다면, 결국 본인 ‘자신’ 의 충족의 문제이긴 하나 그런 외부적인 것을 다루고 싶다면, 이 기술은 필요하다. 꼭......

5. 내가 여기 있게된게 이미 정해진 것인가? ‘팔자’ 일까?
 ‘어쩔 수 없이 그랬다.’ 는 순간들을 운명으로 정해져 있었다거나 팔자였다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시공간 특성상 ‘이미 지난 것’을 되돌릴 수 없다고 해서,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천연두의 창궐을 막을 수 없었다. 분명히 천연두란 병균이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몰랐고, 그것의 특성에 대한 지식 축적이나 실체를 알기 위한 노력 시도도 없었던 것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막을 힘도 없었다. 그러나 후에 ‘충분한 시간’ 과 인간의 지적인 추구의 정보 축적 및 정보 처리를 거친 후에 드디어 천연두에 걸리는 사람은 거의 사라졌고, 인간이 공간안에서 시간이 감에도 천연두를 다룰 수 있게 되어졌다.

6. 그래봤자 결국 인간 입장으로 생각하는 거잖아? 실체는 다를 수 있지 않나?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서의 의미”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에게 의미가 없으면 사실상 모든 지식이나 추구 자체도, 우주가 어떻게 생겼던들 돌에만 의미가 있고 인간에게 의미가 없다면, 그 지식을 억만장을 써놓는다 한들 또다른 외계 생명체나 신이 아니고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을 읽고 느끼고 써먹어줄,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산물인 지식은 인간 자신의 관점에서 스스로가 자기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원리를 밝혔기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인간 자체도 정자와 난자가 “있었고” 그것이 “인간” 이란 형태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이것이 실존이다. 그리고 돌아가면 시공간 자체가 현재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그 자체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이것이 어디서 왔건 이유야 어쨌건 물질로써 현재와 같이 인간에게 의미가 있기에 유의미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 물질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조성이 된 세계 였다면 그 안의 ‘지각을 할 수 있는’ 개체에게 유의미했을 것이지 현재 시공간에 ‘물질’ 로써 존재하는 인간에겐 모르는 일이다. 본질적으로 ‘시공간’ 자체도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존재하는’ 형태 그것을 현재 인간이 그 안에서 이런 형태로 지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지 상대성 이론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본질이 상대적이거나, 아니면 원리를 적는 자에 의해서 크게 다른 본질로 보이게 되는 그런 속성이다. 말하자면 시공간이 이렇게 생겼기에 인간에게 유의미한 것이지, 다르게 생겼다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고 자유의지니 지각이니 하는 것도 없을 지도 모른다. 당장 이러한 시공간 구성 상태의 다른 개체를 보면 돌은 생각하지 못한다. 이렇게 조성된 시공간의 내에서 단지 구성 상태가 다른 다른 개체만 해도 돌에겐 이 세상 구조가 무의미할 수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뇌조차 발생하지 않아 무의미 한데 인간마저 사라지게 되는 다른 구성 상태의 상황에선 우주가 매우 정교한 원리로 짜여져있다 한들 누구에게 원리가 의미가 있겠는가?

7. 그럼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이렇게 있는 “실존” 에 대해서는.

인간은 태어나서 실존이 있는 것이고, 생각해서 생각이 존재하는 것이고, 자유 행동을 해서 자유 행동이 실존하게 되는 것이다. 후에도 말하겠지만 “정해진 것이 없는 미래” 속에서 확률을 가지고 만들어 가는 그런 구조 속에 “자유 행동을 하겠다.” 하고 그것을 실행함으로써 그로 인해 자유가 실존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그랬던 같은 사람이든 다른 사람이든 “난 자유가 없어.” 하고 자유 행동을 하지 않으면 역시 자유는 실존하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렇고, 역시 이것도 마치 상대성 이론이 사람은 제각각의 시계를 가지듯, 사람은 제각각의 자유를 가지게 되는 그런 구조이고 문제이다. 그러면 “본질적으로” 그 사람은 원래 자유가 있던 사람인가, 없던 사람인가? 그보다는 그 사람은 “자유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 이 있는 구조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고, 순수한 진화이건 지적 설계이건 그것은 ‘시공간‘ 안에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이 갖추어진 그런 상태가 되었다고 파악할 수 있다.

8. 그럼 인간이 “실존”을 하는걸 알았고, 그런 “실존하는 인간” 이 왜 자유가 없다고 느끼거나,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 논쟁이 되는가? 단지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 선천적으로 아는 “선지” 가 없어서 인가. 왜 모든 자가 공평하게 그런 자유를 깨닫고 쓰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가.

 분명히 “인과” 라 하는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또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의 산물이나 자연 등의 “힘” 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 가 제한되고 때론 “자유” 의 존재 자체도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그것을 쓰지도 못하고 평생을 살 수도 있다. 그것은 “그냥 그런 상태” 이다. 도처럼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인과적 사건이나, 혹은 “자유” 의 존재 자체도 깨닫지 못하도록 “계기” 가 오지 않았거나 아니면 “힘” 에 영향받아 묶여서 “난 자유가 없어.” 할 수도 있다. 이미 흘러온 인생이 무력하여 더 그런 심증을 굳힐 수 있다.

9. 그럼 인간은 “자유” 가 있는가? 그걸 쓰는 방법은.

 그러나 난 “자유가 있다.” 고 말한다. 왜냐하면 힘의 제한이나 인과의 계기를 어쩌지 못했을 뿐, 그것을 깨닫고 쓰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때부터 “자유” 가 실존하는 그런 시공간 세계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경험칙으로 알고 있다. “실수를 했을 때 그것의 이유를 분석, 통찰하여 다음번에 실수를 하지 않는” 그런 습관과 방법은 수많은 성공처세 서적이나 자기계발 서적에 많이 담겨 있고 많은 사람이 알고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미 그런 것이 나와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나 그런 것을 갖추지 못한 시절에 실수를 하고 그 댓가가 참혹하리 만치 심한 경우가 있다.
 그것을 단순하게 “인과” 의 책임이라고만 돌릴 수 없다. 또 “팔자” 도 아니다. 단지 그러한 시스템을 구축을 못하였을 뿐이고, 마치 민주주의 이전의 왕정들에선 그것이 절대적이었다가 민주주의가 발생한 이후에는 거의 모든 국가가 그런식으로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중세의 불합리함을 많이 개선을 하였듯(그러나 역시 지금도 민주주의는 개선할 점이 많다. 그러나 적어도 중세 왕정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또 천연두나 페스트의 실체를 알고 관리할 수 있어, 지금은 천연두나 페스트가 지구 상을 휩쓰는 일이 없듯이 그런식으로 인간의 지혜와 “자유의지” 와 그것을 지속하는 제도화로 관리가 가능한 인간 자유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제도화” 도 유전으로 전수를 받건, 인간이 창안을 하건 그때부터 “실존” 하게 되는 그런 속성을 가졌다.

10. 그럼 “자유” 는 인과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되어 존재할 수 있는가.

물론 이런 “자유의지”를 쓰고, 그런 아이디어를 창안하기 까지 인과도 개입을 하였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유의지” 도 가능하게끔 돌아가는 그런 식의 시공간의 구조이다. 그것을 “현재 단지 인과로 진행하고만 있는 세상을 자연적으로 어쩌다가 혹은 어떤 이유로 발생한 인간의 두뇌라는 것이 인식만 하고 있는거면 어쩌냐?” 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또 최근에 뇌과학 연구로 인간이 의지 신호가 발생한 이후에 스스로의 행위를 지각하기 때문에 “자유” 는 착각일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대기도 한다. 그러나 경험칙상 논리와 분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의 합”에서 발생하는 그런 부분들이 있고, 그것에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우주 밖에서 인간의 자유가 존재할 수 있느냐.-그건 우주의 밖에 나가서 인간이 생존할 수 없기에 6. 번 같은 문제라고 본다.

11. 그럼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그것은 역시 어떻게 증명을 하냐고? 증명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시공간 안에 인간이 현재처럼 있기에 “인간이 있다.” 고 하듯이 그러한 문제이다. 현재와 같은 시공간 구조이기에 “자유” 가 발생해 있고 이것을 인간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시공간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설명 편의상 구분을 한다면-을 넘어서면 과연 자유 작동이 있는가 없는가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아마 그땐 인간이란게 거기서 작동을 안할 수 있고, 또 생각이나 지각이란게 무의미해 질 수도 있어서, 시공간 내 현재처럼 존재하고 또 빅뱅-이 있다면-과 우주 진행으로 인하여 계기가 되고 영향을 받아 생겨난 “인간” 에게 역시 “자유는 유의미하고 있다.“ 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생각함으로 인해 그 생각이 실존하게 되고 행동함으로써 자유가 실존할 수 있다.

12.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고 하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럼 계속해서 지금도 흐르고 있는 시간으로 인해서 모순이 발생하는 문제는 어떻게 하는가?

 인간에게 ‘자유’ 가 존재한다 함은 미래를 다룰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미래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과” 는 있을지 언정 “힘” 도 역시 작용하고 인간의 “자유” 로도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시간은 흘러간다. 그러면 단편적으로 생각한다면 시간이 시시각각 바뀐다면 흘러가는 시간을 잡을 수 없기에 미래를 다루는 원천적인 “자유” 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미래가 오기전에 빛보다도 빠르게 신경 신호가 먼저 발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일단 인간은 구성체다. 분자에선 자유가 없다가 구성 상태 자체가 시공간내에서 “자유”를 갖기도 한다. 그건 정자와 난자가 양분에 의존하나 그렇게 정자와 난자를 만나게 까지 만든 어떤 ‘힘’ 의 존재도 그런 구조에 작용한다. 다시 말해 다른 차원이 있고 그건 자유의 영역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구성체’ 에선 희안한 일이 발생한다.-시공간이긴하나 시간보단 공간위주와 그걸 인식하는 거시계적 발달로 그간 기억이 형성되고 사물을 분별하고 시간이 흐르나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인식이 나기도 한다. 이러한 일상계의 인식이 상대성 이론으로 맞든 틀리든 어쨌든 실존이다. 인간에겐.(6번) 그러므로 여기서의 세계도 실존으로 다루어 주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물리적 관점에서도 풀이해 보자면,
 상대성 이론을 참고하여 ”시간 개념“ 이란 것을 뒤엎고 조작을 한다면 빅뱅과 시간진행이란 것도 사실은 ”일시에“ 일어난 사건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이것은 수식으로 푸는게 가능할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우주의 역사가 ”시간“ 이란 개념을 빼고 ”공간“ 으로 치환을 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의 시간“ 은 모두 공간적으로 자리 이동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안의 물질 작용도 모두.
 이러한 생각의 확장은 사실 “모든 인과” 라는 시간의 연속을 공간적으로 치환해 보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본다. 구체적으로 “미래에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하여 지금 모든 필요한 정보와 그것의 처리능력과 대처능력과 힘... 등을 가지고 있다면(다분히 경험칙적인 범위와 영역으로 ”공간“ 에 대한 문제-인간에게 있어서, 인간 기준에서 : 앞서 통찰한 시공간의 속성 구조를 기반으로 성립)?” “시간” 이 가고 그것에 따라 오는 “미래” 라는 것을 통제하고 인간의 의지로 다룰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경험칙으로는 이미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했지만 개념적으로는 시간적인 것을 ?인간 기준의 경험칙적인 입장에서-공간적인 것으로 치환하여 다루는 그런 문제이다. (제도화라는 것도 비슷한 속성이 있다.) 이로 인해 기술의 전수가 가능하고 “현재 시점” 의 시간대에 공간적 역량 축적을 기점으로 미래를 다룰 수 있게 된다.

13. 그러면 미래를 다룰 수 있게 되는가? 그리고 이것의 효과는?

 사실 “초기에 실수를 안하는 문제” 는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고질적인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식을 안하거나 넘기거나 감정을 느끼고 애통해 하지만 사실 이건 “성서”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시기부터 시작된 문제이고, 또 신자체도 겪었던 문제이다. 예를 들어서,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에서, 하와(이브)가 당시 사전 지식이 있었고, 또 그것에 대한 징벌을 구체적으로 알고 충분한 직간접 경험을 통하여 그 심각성을 충분히 알면서 각인하고 “뱀” 이 사기꾼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면, 아마 그렇게 쉽게 선악과를 깨물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시공간’ 자체의 오류이기도 하고, 인간의 두뇌의 오류이기도 하다. 마치 현대로 대입해 보자면 “보이스 피싱” 이라는 사기를 알고 있고, 그것에 당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그것이 뇌자극을 통해 “위험 회피” 라는 반응이 확실히 나야 그것을 피하고, 또 대처법 까지 안다면 즉각적인 신고를 통해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을 당시 갓 창조된 아담과 하와는 갖지 못했다. 현대에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는 말이 있다. 이것이 여전히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되는 이러한 공통적인 문제를 말해준다. 인간 역사상 아직도 해결이 안된.

14. 그러면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었던 “초기에 실수를 하는 문제” 의 실체와 그것의 해결방안은 무엇인가.

 또 비슷한 일로 다른 직업군에 비해서 법조인이 범죄로 기소되는 일이 적다고 하는데 그것은 법을 잘 알아 피해가는 수도 있으나, 법을 잘 알기 때문에 그렇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사전 지식이란 것은 상당히 중요하고, 또 정보처리력도 중요하고, 자신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능력(뉴런과도 직결되는)도 중요한데 특히 자신을 조절하고 통제할 때 스스로의 구조를 잘 알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본능이라든가 이성이라든가 하는 것을 구분짓거나 그런 행위를 할 때 이어지는 징벌과 보상 등에 대해 ‘생각’을 함으로써 그렇게 회피하는 결단을 통해 “생각대로 스스로를 움직이는” 그런 능력이 상당히 중요한데, 그것을 대다수는 태어났을 때 하지 못하고,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그런 기능이 약한 사람들도 많고 하여 어릴 때 취약할 때 또래 심리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나이먹어서 까지 “계기”를 만나지 못하고 훈련이 되지 못하고 인과에 실려 자기 없이 살거나 자유의지를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알콜 등으로 그런 자유 상실이 가속화 되어 법의 처벌을 받거나 인생의 혼냄을 받는 일들이 있다.

15. 그러면 그런식으로 불공평하게 시공간 특성의 “인과” 혹은 “계기” 나 선천적 결함으로 인해 “자유의지”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상황의 사람들이 처벌이나 고난을 받는 것은 부당한 점이 있다.

사실 이것은 과연 사람의 자유의지는 실존하고 현재 법적 처벌이 온당한가? 하는 법철학적인 문제와도 직결이 된다. 그런데 나는 “사람의 자유의지는 실존하지만, 대다수가 자연상태에서 그것이 깨어나는 것이 미비하고, 또 그것도 민주주의나 국가 제도처럼 ‘관리’ 가 필요한 문제 중에 하나” 라고 생각한다. 법적인 처벌이 문제가 아니라, 법을 준수하라고 하기 이전에 효과적으로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와 뇌의 구조, 인간의 시공간속 현주소를 충분히 깊숙이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한 교육적 속성의 제도 부분이 완전히 뻥 뚫려 구멍이 나있다는 판단이다. 사실 그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책임을 묻는 두뇌 작용 자체가 틀린 작동이다. 단지 지금까지 “계기” 가 없었던 것이고 “몰라서 저지른 일” 이다. 법은 그런 것을 “죄” 라 할 수 있지만, 사실 “죄” 이든 아니든 질서유지적인 측면에서 처벌을 하고 있을 뿐, 철학적으로 따지면 자연의 죄이고 설계의 오류이지 자연 상태의 사람이 무슨 죄이겠는가. 단지 그것을 깨닫고 알면 그때부터 노력을 하고 제도를 정비하고 자신을 다스리고 전체를 관리하는 노력과 정립이 필요한 것이지 그 후에 죄를 물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유 행위” 란건 충분한 정보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그런 정신은 민법 제 104 조 (불공정한 법률 행위)의 “당사자의 궁박,경솔,또는 무경험으로 인하여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 라는 조항에도 잘반영이 되어있다. 아울러 민법 제109조(착오로 인한 의사표시)의 ”제1항 의사표시에 착오가 있는 때에는 취소할 수 있다.그러나 그 착오가 표의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때에는 취소하지 못한다. 제2항 전항의 의사표시의 취소는 선의의 제3자에게는 대항하지 못한다.“ 그리고 민법 제110조 (사기,강박에 의한 의사표시)에서 ”제1항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퓌소할 수 있다. 제2항 상대방 있는 의사표시에 관하여 제3자가 사기나 강박을 행한 경우에는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았거나 알수 있었을 경우에 한하여 그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 제3항 전항의 의사표시의 취소는 선의의 제3자에게는 대항하지 못한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모두, 인간 자체는 모두 그런 정보 취약 상태이다.
 민법 상으로는 “경솔, 무경험으로 인하여 체결한 계약은 무효“ 다. 그러면 경솔이나 무경험으로 인하여 저지른 살인이나 절도죄도 무효인가? 이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시공간과 물질인 인간의 특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다면 질서유지를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단지 그렇게 시공간이 생겨나고 인간이 생겨나 그걸 익숙하게 느끼게 적응을 한 것이든, 계획적으로 그것이 익숙하게 느끼도록 한 것이든 어쨌든 그런 모양새로 시공간이 존재하고 물질로 구성된걸 바꿀 수가 없으므로 그것을 영혼만 처벌 한다거나 할 수는 없고, 어쩔 수 없이 바꾸지 못하는 현재 조성 상태에 맞게 관리를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존하여야 하기 때문에. 왜 생존을 하여야 하느냐? 멸망하면 안되느냐? 그것은 이런 질문과 비슷하다. 한 개인에게 왜 자살하지 말아야 하느냐? 그것은 증명이든 과정 설명이 어떻든 결론은 그렇다. ”자살하지 말고 행복해야 한다.“ 그것이 철학적으로 아무리 ”인간은 현재 단지 인식만 하고 자유는 없다.“ 고 주장한들 심지어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모두 가짜고 본질적으로 실존하고 있지 않다.“ 고 주장을 하든지 ”인간은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는 불가지론을 주장하든지 어쨌든 인간기준에선 인간은 존재하고 살아있고 생각하고 활동하고 자유를 쓴다. 그것으로 실존 문제는 충분한 것이다. 이것이 ”기준“ 이 되어야 한다.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데카르트-“는 명제를 부정한다면 현재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 되는데 그게 인간에게 무슨 의미가 있고 써먹을게 있겠는가? 인간이 생각하고 있기에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는 것이므로 어쨌건 현재의 시공간내의 인간으로서는 이런 관점이 유용하고 기준이 되는 편이 살아있는 동안의 한평생에 유리하고 이런 기반과 암묵적 전제하에서 인간은 발전해왔고, 기술 성립도 가능하다.

16. 그럼 성서의 사례는.

 민법 의 관점을 확장한다면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속여 넘어가서 결국 하나님의 처벌을 받게 된 사건도 무효인가? 그건 하나님께 물어봐야겠지만 아담과 하와 때부터 그런 인간의 취약성이 있었고, 하와가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하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나 아담이 하와가 권해서 함께 먹은 그런 행위도 모두 경솔과 무경험으로 발생한 일이다. 민법 상으로 볼 때는 신은 인류의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을 대속하게 하여 메시야를 보내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대속한다는 한계점이 있다. 과연 순수하게 인간이 죄를 진 것인지 아니면 시공간과 인과가 그것에 확률상 그럴 수 밖에 없게끔 했는지는 일단 사람의 법은 차치하고 근본적으로 철학적인 문제로서는 신이 많은 책임을 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나는 더구나 일방적인 하나님의 주장은 무효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철저하게 부당하고, 단지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만으로 에덴 동산에서 쫒겨나서 수많은 인류가-하나님께는 별게 아니지만 인간들 스스로에겐 너무나 가혹한 역사다. 수많은 전쟁과 기근, 그리고 범죄들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은 현대의 기준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선악을 아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에게 그렇게 심각한 일이였고, 생명나무 과실 마저 따먹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는가? 그럴 수 있다. 하나님에게는. 그러나 인간도 그렇게 확률상으로 인간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데, 인간을 창조한 신이 그것을 예측을 못하였는가? 예측을 하고 있었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장난이 되고-왜 괜히 인간을 만들어서, 또 그렇게 만들어서, 그런 선택이 뻔한데 그것을 하게 만들었는가- 예측을 못했어도 그럴 수 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인간이 RPG 게임을 만들었다고 할 때 개발자가 유저로써 플레이 하여 끝 판까지 클리어를 못할 수 있고 내부 등장 인물들을 이기지 못할 수 있다. 그건 (어떤 필요성이든)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인데, 하나님도 그렇게 만들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내부적 문제건 아니면 외적 요인이건.
 그런데 이 상황을 볼 때, -인간이 태어난 후에 선,후천적으로 인식하였던 방식으로 혹은 배웠던 익숙한 방식으로 개념화하여 해석하긴 하나 성경도 이런 관점에서 말하고 있으므로 이런 관점을 채택하기로 한다. 인간이 개념화한 방식이 틀렸다고 한다면 성경의 설명도 틀린 것이므로.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작동하는 본질적 원리가 어떻든 간에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 자신이 예측을 할 수 있었다면 정보가 있음에도 인간을 그런 취약 구조로 만들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고, 혹은 마치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마시멜로 실험을 하듯이 그중에 마시멜로를 안먹고 꾹 참고 기다리는 아이를 고르려고 했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시도는 틀렸다. 왜냐하면 그건 보통 유전이나 후천적 교육에 의한 당시 뇌형성 및 작동으로 결정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시멜로를 먹어 버리는 아이들 중에서 ‘기적’을 기대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 변수에 결정되는 부분이므로 이 부분도 약하다. 그럼 거의 마시멜로를 먹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것을 먹지 않는 선택을 하길 원했을까? 이 부분도 틀리다. 그러면 마시멜로를 먹을 가능성이 반반인데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참는 아이의 행동을 원한 것일까? 그건 슈뢰딩거의 고양이 문제가 되어 버리고, 실제로 하나님이 그런 반반의 확률을 가지도록 한 상황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인간 자유의 작동”을 실험하기에 좋을 수 있으나 변수의 개입으로 완전히 판단이 무너져 내리기 좋은 상황이라는 것을 볼 때 이것도 합리적이지 않다. 결과적으로 창조주 하나님부터 기본적으로 정보도 알려주지 않고 이 말 저말에 취약하여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간 뇌’ 의 취약 점을 고려하지 않고 배려 없이 그런 게임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인간의 원죄란 단지 바카라나 블랙잭에서 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정보를 모르고 두뇌 사용법 조차 익숙지 않은 상황에서, 뱀의 사기에 말려서(그러나 결과적으로 뱀의 말은 진실이 되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선의의 거짓말이 겠지만.) 그런 판단과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질서유지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죄를 묻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그 사건 후 남자는 밭을 갈며 고생을 하게 되었고,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가지게 되었다. 이건 곧 인생의 고난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후의 모든 악행이 다 인간의 잘못일까? 인간이 선택을 하여 그렇게 진화하고 벌어진 일일까? 그보다는 악행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상과 불이익의 회로에 따라 그렇게 발달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악행을 하지 않고 선을 행하기를 기대했다는 것인데 그러기에 마치 부나 신체의 불공평처럼 모든 인간은 정신의 불공평과 함께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불공평도 가지고 태어난다. 말하자면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에 필요한 것을 기본적인 것 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고 역시 동일한 출발선 상에 서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의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듯이 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그 전에 이런 부분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다.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스스로를 조절하는 유전적인 소양에 대한 부분이고, 또 그러기 위해 후천적으로 전수받고 습득하는 지식과 교육이나 자기몸사용법에 대한 부분이고, 또 그런 부분에 대해 누구나 공평하게 자연적인 불공평을 극복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잘 조절할 수 있도록 전체적으로 누구나 기회를 부여하는 제도적인 문제인데, 이 제도라는 것도 사실 그러한 선천적인 뇌에 맞는 훈련과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자본과 방법들이 필요하다. 만약 이런 효과적이고 이상적인 교육이 될 수 있다면, 당장 모든 사람이 학업을 만점 맞을 것이다. 그런 제도화로 모든 자를 바꾼 다는 것은 이상론에 가깝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현재로써는 무슨 문제가 있냐면, 그렇게 교육을 하여도 인간 자체의 뇌의 구조 및 특성적 문제와 개인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뇌의 특성들이 그것을 자기도 모르게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거나, 그것을 간직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또래나 다른 정보에 휘둘리거나 한다는 것인데 시공간과 인과의 특성상 이것을 통제, 조절하기란 상당히 힘들다. TV 가 없어도, 전체적인 세뇌가 잘 이루어져도 많이 나아지긴 하겠으나 역시 마찬가지 일텐데 그래도 최대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그렇게 전체 세상에 대한 관리율을 높여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발달로 인해서 살인이나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인류 역사적으로 많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이 있음에도 하나님은 역시 “노아의 방주” 사건에 나온 인간 전체에 대한 대홍수로 단지 처벌에만 급급하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잘못을 모두 말하고 전 인류가 공감한다 한들, 창조주는 역시 세상을 다룰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래서 인간을 물질의 한계에 갇히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의 창조를 믿고 그 아들을 믿는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았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지혜로. 이 일을 어찌할꼬.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는 말이지만 “하나님의 역사” 가 이루어진 것은 스스로나 대다수의 일에서나 거의 없다고 본다. “이 세상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셔도 이 세상 존재 자체가 증명하고 있진 않다. 그건 어쩌면 잘못된 오류에 빠진 판단이다. 인간은 오류도 빠지고 그렇게도 행동할 수 있는 “자유” 가 있으니.

17. 이런 작동적인 측면 말고 인문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하면 어떤가.

 그리고 인간에겐 “진심” 이란 부분이 있다. 역시 과학으로 다룰 수 있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반응” 같은 그런 심리적 부분과 함께 생겨난 실존 요소 시스템 중의 하나인데, 그런 “진심” 과 인간적인 부분도 중요한 부분이다. 과거 일부 선생님들의 훈육이 그렇게 애정없이 자신의 목적을 방해한다고 하여 관리상 편의 만을 위해 체벌하고 다른 학생에 대해선 편애하고 이러한 것들을 볼 때 진심도 받는 사람이 받는 것이 겠지만, 그렇게 “진심” 으로 애정을 가지고 한다면 될 수 있는 일도 그르치는 것을 보았다. 그 전에 그런"진심“을 알 수 있고 받아들 일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고질병인 ”조건반응“ - 진화적인 생존과 유리를 위해 상대의 외모라든지 느낌이라든지 다양한 조건들에 의해 반응하고 유전적인 냄새를 맡고, 파악하고 신뢰하고 동료가 되든지 아니면 혐오나 적이되든지 하는 부분(왕따란 이런 부분들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발생한다) - 이 강한 인간의 역사나 그런 부분을 극대화하고 소비하고 권장하는 현대 자유주의, 자본주의 환경에서 당연히 그런 ”진심“ 이라든가 인간적인 부분이 축소되거나 아예 발달하지 못하거나 폐기 될 수 있는 여지가 많고, 이런 부분은 개선이 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은 ”진심“ 과 ”인간적인 것“을 할 수 있기에 그것이 실존하게 되고, 그럼으로 ”인간“ 이란 것이 실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현재 소비되는 그런 비인간적인 부분들을 극대화하면 그것이 실존하게 되고 역시 인간은 비인간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재 그런 흐름을 조절하기 힘든 구조적 한계성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조절이 가능하도록 개선해야할 부분들이 있다.

18. 지금까지 했던 것을 구조적인 측면에서 간략하게 정리를 해본다면.

정리를 해본다. 그러면 “인간이 미래에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인간이 그간 최선으로 살아왔던 경험을 관조하는 것에 해답이 있다. 분명히 인과도 작용하고 “계기” 도 필요하고, 인간의 출발선은 각기 다르고 “아직까진“ 모두가 자유를 제대로 발휘하고 살지 못하고, 매번 그러지도 못하고, 어쩌면 평생 그럴 수도 있는 취약한 상황이다. 거기엔 유전적인 차이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심지어 선천적인 ”운“ 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최대한 이런 방법을 접하여, 인간은 일단 미래를 다루고 인생을 헤쳐가는 자신을 조절하고 다루고 의지를 관철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게 현실적으로 힘들다. 현재 구조로서는. 그러나 그럼에도 최대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정보처리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응시나리오가 있거나 나오고 창출될 수 있어야 하고 거기에 따른 행동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혼자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운” 부분도 통제가 가능하여야 한다. (“운”을 통제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아마도 일기 예보를 다루는 부분이다. 태풍을 예상함으로써 태풍의 피해를 최소화 한다. 그리고 이것은 “계기” 에 의했지만 지혜로써 노하우를 만든 것이고, 인간의 자유나 행동패턴도 개입한다. 전적으로 “인과” 만의 단독문제는 아니다. 구조적으로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부분 “힘” 에 의존하고 이것은 과학과도 직결된 부분이 있다. 이런 “힘” 이 그렇게 선천적인 “운” 으로 생각했던 그런 부분들도 많이 개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엔 태풍이 오면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으나 이젠 많은 부분 “인재” 가 된다. 사람이 많이 대비하고 막을 수 있다. 전염병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들에 대해.......

19. 마무리 하며 ? 이건 국가 차원의 일

 그리고 이것들을 국가 차원에서 모든 아기들의 가정을 관리하고 양육 취약에서 자신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건 아직은 너무 많이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 미래에는 가능할 지도 모른다.

20. 끝맺음

이 글 또한 역시 “인과” 의 영향을 받고 많은 사람에게 알려질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고, 일단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제도화가 되고 그것이 민주주의처럼 굳건히 인류의 전통이 된다면, 그 후로 자손대대로 더 이상 모든 인간들이 겪는 “첫번째 실수”를 안하게 되고 그에 따른 불이익을 겪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안받고 애달파 하지 않겠지. 그런 바램으로 이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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