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6일 일요일

세월호를 통해 깨달은 삶의 진리

"세월호를 통해 깨달은 삶의 진리"


-선박 사고를 통해 얻은 깨달음
-사회로의 확장
-모든 것을 움직인 한가지 원리
-극단적인 예들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
-과학이 희망이다.
-맺음말



책소개

배사고를 통해 깨달은 삶의 진리

보통 말잘듣는 애가 성공한다고 한다. 또 행복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책이다. 특히 사고를 통해서 얻은 깨달은 삶의 진리를 밝혀보고 그것이 왜 말안들어야 행복한지를 서술해주는 책이다.


저자소개

끊임없이 도를 추구하는 구도자. 도란 내 마음속에 있다. 세상의 제도와 관습으로 정해진 교수나 연구자의 직업도 있지만 사실은 진정한 도의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도 끝없이 도와 진리를 추구하면서 세상에 자신의 사상과 존재를 알리고저 노력하는, 이 시대 남은 먼 미래의 기록으로 남을 외계인에게 인정받을 구도자, 행복을 찾는 작가.


"말 안듣는 애가 행복하다."


-선박 사고를 통해 얻은 깨달음

구체적 사례를 밝히진 않겠지만 근래 수십년중 최대 규모의 선박사고가 있었다. 그런데 내부를 들여다 보니 그렇다. 일단 배가 가라 앉으면 탈출 자체가 힘들다고 한다. 수압도 수압이지만 미세먼지와 부유물 들로 인해 한치 앞이 안보이기 때문에 내부에 가라앉은 사람들은 수영을 특별히 잘하지 않는한 탈출할 문을 찾을 수 없다. 또한 설령 탈출할 문을 찾았다고 해도 헤엄을 치지 못하면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속으로 끝없이 빠져 수면위 구조선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끝없이 빠지고 생사를 알수 없게 수장이 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헤엄을 쳐서 공기가 있는 아직 안가라 앉은 곳으로 올라간다고 한들 매달릴 곳도 없으며, 매달려서 버티기도 힘들다.

그러므로 반드시 배가 가라 앉기 전에 최소한 수면에 맞닿아 있을때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런데 그 상황이 그렇다. 배가 기울었음에도, 배에 타고 있던 승선자들에게 "가만히 있으라." 는 방송이 나왔고, 학생들을 인솔하던 선생들도 "가만히 있으라." 고 구조선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상황이 수십여분, 마치 수업 한시간과 맞먹는다. 그 상황동안 꼼짝도 안하고 "선생님말 듣고" 질서를 유지하면서 기다리다가 빠져서 죽었던 것이다. 집단으로 침몰하여 수장...

그런데 반면에 방송을 어기고, 선생님이 조용히 시키든 말든, 제제를 하든 말든 밖으로 못참고 나와버리고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을 밀치고 밖으로 나가면서 자신이 살려고 혹은 바다에 뛰어들기라도 할 심산으로 나온 아이들은 살았다. 또 오랜 인생 경험과 선생이고 권위자고 무시하고 밖으로 나와서 첫번째 구조선을 탔던 사람들은 목숨을 건지고 살았다.

이런 상황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단지 그런 특수한 상황이라서? 아니다. 여기엔 중요한 삶의 진리와 지혜가 있다. 늘상 가지고 있던 논리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계속 실수를 반복하여 책으로라도 써서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진실과 비밀을 알려주려고 한다. 그러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

위의 상황이 언뜻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은 두가지 부분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선생님의 말을 들은 사람들, 두번째는 선생님의 말을 어긴 사람들이다.

굳이 부정을 할 수 있고 합리화를 할 수 있지만 사실은 행동은 인솔자의 말을 어긴 결과이다. 그 댓가는 목숨을 건졌다. 새생명을 얻었다.

그 이유는 그렇다. 이 세상의 비밀인데,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욕심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교묘하게 움직이고 싶어하는 욕심을 가진다. 그런데 그것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90% 이상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쪽보다 듣지 않는 쪽이 사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기본적으로는 높다는 것이다. 진짜 자기를 생각해 주는 지인이나, 혹은 모든 것에 통달한 경험많은 멘토나, 혹은 진짜 있는 그대로의 진실만을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다. 그러면 이 책을 쓰고 있는 나는? 마찬가지로 나도 인간이므로 욕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으로 깨달은 것을 책값 몇천원과 바꾸기 위해서 적는 것이므로 정당한 거래라고 생각한다. 지불할 돈은 수천원 이지만, 실상 그 가치는 수백억이 되거나 인생자체, 혹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목숨값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이 책을 덮어도 좋지만 이 진리가 먼 미래에도 많은 사람을 구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면 그 "선생님" 이나 인솔자들은 그렇게 공동으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기 이익이나 자기가 살고자 하여 그렇게 함께 죽는 상황을 방치했을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을 것이다. 같이 살고자 하고, 그것이 공동이 살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이, 배 전체가 가라앉지 않고 구조되기를 예상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상황에서 그러한 행동을 하였을까? 그건 단지 세간에 알려진 바대로 선장과 승무원들의 이기심으로 자신들만 살고자 "가만히 있으라." 고 방송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 선생님들이 그런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건 바로 질서를 유지하고 통솔하고자 하는 욕구가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상황에서 질서를 깨고 우왕좌왕 중구난방으로 행동하여야 하는가?

여기에 딜레마 상황이 있다. 질서를 깨면 자신은 살 수 있다. 반대로 질서를 지키면 함께 죽는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질서를 지켜야 공동으로 살 수 있다." 는 원리 원칙으로 보이는 대전제에 모두가 속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특수한 재난 상황으로 보이지만 확장하면 이 세상 자체, 또 인간 사회는 사실은 그런 곳이 아니다. 약육강식이란 원리가 존재하고 적자생존으로 움직이며 진화의 need(필요) 가 반영된 결정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건 최초 설계자가 있든 없든 마찬가지로 진화를 통하여 반영이 된 것이다. 신의 허락혹은 암묵적인 방관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고 설령 부정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불의이다.

만약에 질서를 깨고 자기가 먼저 나간다면 분명히 먼저 구조가 될 수 있다. 그 후의 학교생활이건, 인생 자체이고 뭐고 선생님이란 사람의 체면이고 뭐고 간에 먼저 나온 사람은 살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친구를 생각하고, 선생님을 생각하고 평소 말을 들으며 바보스러우리 만큼 공부시간에 "어른 들 시키는 대로"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죽었다. 안타깝게도.

나의 생각이 반사회적인 것도 아니고, 편협한 것도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서술한 것이다. 말하자면 인정하긴 싫지만, 사실인 불편하지만 솔직한 진실이다.

여기에는 안타깝지만 한가지 개념을 이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질서를 지키도록 통솔한 행동" 은 사실 선생님들의 습관이었고 당시 모두를 구하기 위한 최선의 행동책이 아니라 진화에서 반영된 진화행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만약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 였다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질서를 좀 깨더라도 바다에 뛰어 드는게 나았다. 당시 근처에 지나는 민간 구조선이 있었고, 그 사실을 문을 닫고 가만히 있느라 대다수의 학생들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공동으로 수장을 당해버렸다.


-사회로의 확장


이것을 사회로 확장해 보자.

기존의 "어른 말들" 을 들은 사람들. 실제로 사례에서 확인해 보자. 정말 당신은 행복한가?

내가 확인한 바론 그렇다.

사실 부모님 말씀, 선생님 말씀, 혹은 사회 제도의 목소리, 기성세대, 기득권 혹은 그런걸 대변하고 대표하는 소위 앞서 말한 배에서의 "인솔자들" 에 해당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사실 인생전체를 놓고 봤을 때 그 말을 듣지 않고 어긴 사람들에 비해 불행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거기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고, 오랜 연구기간의 통찰과 검증, 확인들이 있다.

"나쁜 사람이 성공한다." 는 의견이나 진화심리학의 최신 연구들과 일맥 상통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그렇다. 그런 "기성세대" (앞서 말한 "말듣기를 강요, 회유 등 권력을 행사하고 시도하려는 자들" 을 통칭해서 "기성" 이라고 하자.) 들은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욕심이 있다. "자기 자식 잘되라고" 그런다지만 이것은 어폐가 있다. 사실은 "자기 자식 잘된다." 는 말속에 숨은 뜻을 생각해보자. "자기 자식이 잘된다." 는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정말 순수하게 "자식이란 개체" 가 잘되기 만을 바라고 그것만으로 행복하게 되는 것일까? 잘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슨 뜻이고 또 여기에 숨겨진 "부모님의 뜻대로" 잘된다. 는 의미를 이미 생략 전제한 말이다.

말하자면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속에는 이미 "내가 생각하는 의미에서 잘된다는 이상향의 모습으로 니가 커주기를 바라는 나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어." 라는 뜻이 있고 그러한 뜻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그러나 슬픈건 그런 뜻을 이해하고 이면을 이해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냥 곧이 곧대로 정말 "자기 자신" 이 "잘되기를" 바래서 그런다고 수면위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미 물밑에는 "부모님의 뜻대로 조종당한다." 는 진의가 숨어있다.

그러면 일단 왜 잘되야 하는가? 라는건 일단 모든 인간은 '잘되기를' 원하므로 생략하기로 하자. 그리고 "부모님의 뜻대로" 잘되기를 원한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길 원한다. 부모님은 인간이다. 고로 부모님도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는 뜻으로 자식에게 권력을 행사한다." 는 간단한 연역으로도 풀어진다.

그렇다. 사실은 부모님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혹은 알면서도, 부지불식간에 자기의 이익을 자식에게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 뿐만 아니라 선생님, 사회 전체의 모든 개체의 존재들이 그렇다. 동물이고 인간이고 가릴 것 없이. 그 사실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에도 잘 설명이 되어있다.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냐 이타적인 존재냐 혹은 인간은 유전이 절대적인 존재냐 환경에도 영향을 받느냐 하는 논의는 둘째치고 일단 인간은 이타적인 것 조차도 욕구로써 생겨나고 환경의 영향을 받을지라도 유전을 무시할 수 없이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뿌리는 유전적 본능이라고 해두겠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믿을 것은 누구란 말인가?
희소식은 자식, 곧 "자기 자신" 도 그런 존재라는 확인이다. 말하자면 부모만 그런게 아니라 그런 말을 듣는 자신도 그렇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욕구가 있기에 생존할 희망이 있다. 앞서 말한 여객선의 사례에서 처럼 사회 자체도 그렇다.

그러면 부모님이나 기성의 말을 듣는 것이 무조건 안좋은 것인가? 그것만은 아니다. 단지 앞서 서술하였듯, 그것이 틀릴 가능성이 90% 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모님 말을 들어 좋을 가능성은 좋다: 아니다가 1:9 다. 어 바뀐거 아니에요? 9:1 이 아니라 1:9? 부모님의 말을 들어 잘못될 가능성이 9라고? 그 이유에 대해 말을 해주겠다.

이미 이유는 앞서 서술한 것에 내포되어 있다. 왜 잘못될 가능성이 더 높은가?

부모님(혹은 인솔자로 대변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대로 "이미 겪어본 사람들" 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미 겪어보더라도 제대로 겪어보지 못했다. 겪으면서 원리나 진리를 추려내어 자신들의 인생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그냥 시간이 떠미는대로 흘러온 사람들이다. 그 결과가 현재의 모습이다. 섬뜩하지 않은가? 말하자면 선생님이란 집단에는 미안하지만 선생님은 선생님밖에 못된다. 그 직업군이 성공을 못했다라거나 혹은 보람이 없는 직업이라는 뜻이 아니라, 대통령이 아니고, 연예인이 아니고, 혹은 일반인이라도 행복하게,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 어떤 사람" 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게 살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모든 철학과 이상향에서 "행복" 이 삶의 최고 가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 자체도 거짓이 아닌가는 차치하고 이 사실을 부정하면 인간이 지금까지 현재 형태로 형성된 사실 부터 되짚고 수정하여야 하는데 수정이 불가하고 실존도 위협되므로 그대로 두기로 하자.)

그런데 부모님(혹은 "인솔자" 로 대변되는 모든 사람들)의 말씀을 들어 행복해질 수 있는가? 결론은 아니다. 이다.

사회적으로 부모님이 바라는 사람은 될 수 있고 부모님의 기준에서 "성공"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행복하진 않을 수 있다.

그 이유는 부모님도 부모님이 바라는 것을 철학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철저하게 검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자신의 기준에서 혹은 자기 유전자가 보상을 느끼는 것을 그렇게 삼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부모님이 모르는 것이 더 많고 직접 겪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 만약에 그걸 다 겪는다면? 달라질 수 있고 만약 부모님이 아니라 자식으로 산다면? 당연히 달라진다. 만약 "다 살아보고" 도 결국 부모님이 원하는걸 추구한다면? 그럼 그게 그냥 그 사람에겐 맞는 것이다. 혹은 그 나이대에 맞다고 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원하는 것은 사실은 누군가나 현대 사회가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가 어떤 곳인가? 자본가란 소수를 위해 다수의 노동자가 무미건조한 공장에서 하루종일 고생을 해야 하는 곳이다. 거기에 대한 댓가로 철저하게 비인간적인 딱 그만큼의, 혹은 훨씬 못미치는 보수를 받는다. 단지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다수 노동자가 느끼는 상황이고, 객관적인 통찰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 기계만보며 평생을 일한 댓가가 젊음과 모든 인생과 시간을 바칠 만큼의 대단한 일이었나? 그 공장 노동자로 인해 누군가는 운동화를 신고, 핸드폰을 갖겠지만 그런 자기 희생으로 인생을 버릴 만큼의 보수가 평생 집한채도 가지기 힘든 연봉 수천만원이냐는 것이다.

그럼 "말잘듣고 더 벌면 되지 않느냐" 할 수 있다. 기성이 제시한 방식으로 공부하여 바늘 구멍을 통과하여 보수를 더 받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제시한 머리 게임에 왜 등급이 나누어져 보상을 더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왜 그자는 수많은 시민을 대신하여 보상을 제시할 권한이 있는가? 또한 그렇게 보상을 받는다고 한들 그 사람의 인생은 정말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살았고 행복했는가?

그것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의 맹점이다. 설령 사회가 제시 한 방식의 정점에 서있다 한들 그 수는 근본적으로 극소수일 수 밖에 없고, 그렇다고 전적으로 행복하지만은 않다.

재난에서 생존하기 위해 남을 밀치고 먼저 구조되는 상황과 근본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옳은 것" 이라 가르치는 것, 그러나 반대로 그런 재난 상황에선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라 주장하며 "가만히 있으라." 고 하는 것.

이런 사실에서 뭔가 스쳐가는 것이 있다.


-모든 것을 움직인 한가지 원리


얼핏 모순되 보이지만 사실은 한가지 원리대로 행했다. 역시 반복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언제나." 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부해라." "학교 규칙을 지켜라." 는 것과 다른 사람을 밀치고 먼저 구조 받는 것은 모순되고 상충된 행동으로 보이지만 사실 같은 행동이다.

다만 전자는 누군가의 지시를 검증없이, 혹은 젖어들어 세뇌로 움직였을 뿐이고, 후자는 그냥 유전의 목소리대로나 환경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자의로 행했을 뿐이다.

"공부해라." "학교 규칙을 지켜라." "잠잠히 있으라." 는 것이 정말 그 학생이나 공동의 생존이나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일까? 자본주의 하에서는 그렇다.

아니, 자본가나 기성세대의 밑에 복종해야 하는 그리고 그런 책무를 지닌 "인솔자" 들에겐 그렇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할까?

반대로 그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 그 사람들의 기대는 저버리게 될 것이다. 반대로 다른 것이 얻어질 것이다.

그리고 재난의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밀치고 먼저 구조받는 행위도 앞서말한 자본가의 의지나 욕심의 발현과 다르지 않다. 모두 같은 행위였던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런데 왜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모범생" 이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밀치고 먼저 구조받으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몰이해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과 본성, 이 세상 자체에 대한 깊은 통찰과 숙려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발전할 철학은 그런 것을 구체화 하고 현상을 재정립해야 한다. 이미 현대 진화심리학은 인간에게 선과 악에 대한 면죄부를 주기 시작했다.

근본 목적이 선과 악에 대한 기존 개념, 인간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의 본질을 알고 더 나은 존재로 도약하기 위함에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가지 고백이 있다. "나는 학창시절 추억이 없다." 한 모범생의 말이다. 왜 추억이 없을까? 그건 모범적으로 통솔되기 만을 바라는 선생님의 말을 모두 들었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을 가서도 말을 다 듣고 조용히 하고 밤에 오징어도 구워먹지 못했으며, 학창시절 공부를 주로 하고 예습복습을 철저히 하며 친구들과 떠들지도 못했다.

반면에 학창시절 밤에 조교몰래 밖으로 나가 여자친구를 만나거나 남자들끼리 돌아다닌 아이들이 있다.

또는 웃고 떠들며 과자를 나누어 먹고 취침 시간에 일어나 이야기하고 놀 수 있다.

추억으로 남는 것은 어느쪽일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어떤 사람의 이익때문에 혹은 그 이익의 반영을 행하는 사람때문에 다른 한가지의 가능성, 다른 얻을 가능성이 제한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 의 반대쪽으로 가지 못하게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학생에게 둘다 해보고 선택할 권리를 줄 순 없을까? 좀 떠들어도 눈감아 주는 것이다. "그래 추억이지..." 하고.


-극단적인 예들

이것이 극단적인 예일지 모르나 한 가지 사례가 있다. 이 사람은 어머니가 젊은 시절 정상적인 직장을 다니면서도 친척들을 건사하고 생활을 위해서 빚을 지게 되었는데 당시 법이 미비하던 시대라 고리 대금 사채업자에게 무정보 상태에서 걸려 강제로 티켓다방까지 팔려가 일을 하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 어머니가 연애 시절 낳은 자식으로 두번째 남자친구이자 남편에 의해서 강제로 분리가 되어 입양위기에 처했다가 후에 어머니의 지인인 한 집사님에게 길러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누군가에 의해 "티켓다방에서 일한다." 는 사실이 퍼졌다. 그래서 당시 유행어인(현재까지도 사라지지 않는 유행어인) "엄창" 이라는 말과 결합하여 "엄마가 창녀다." 는 식으로 거의 전교생의 놀림감이 되고 왕따가 되고 학부모들 사이에도 '왕따' 가 되어 "놀지 말아야할 소년" 으로 낙인이 찍히고, 그 소년을 보호해 주어야할 선생님-곧 인솔자- 도 그 소년이 친구들의 집단구타와 따돌림,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괴롭힘으로 인해 간헐적으로 싸우게 되자 그 소년을 "문제아" 라고 낙인을 찍으면서, 그 사실을 모두 알음에도 소년을 체벌하며 못살게 굴었다. 그 결과 소년은 학교를 나가지 않게 되고 집사님의 학대와 결부되 가출을 하게 되었고 전국을 떠돌다가 소년원에 가게 되고, 조폭 생활을 하다가 창녀촌에서 일하고 조폭 안에서도 모진 학대와 구타를 겪고 탈출하여 자신만의 인생을 개척하여 살아가고 있는데,

여기에서 "인솔자" 라는 사람이 선생님, 어머니, 어머니의 지인, 어른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이런 경우에 이 소년이 자라기 까지 그 어떤 사람도 도와주지 않았다. 단지 도와주거나 잘못된 것을 주장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소년의 인생을 각기 개입하여 합작으로 부지불식간에 완전히 망가뜨리고 있었다. 그들이 알았건 말았건 어린시절 소년이 발휘할 "자유" 는 과연 얼마나 허용이 되었을까? 단지 기성의 제도와 어른들이 무신경, 무관심에 오히려 가만히 놔두었으면 더 나았을 것을 극단까지 절벽으로 밀어넣는 역할의 합작을 만들고 있다.. 이런 경우는 최악의 케이스라고 하겠지만 이 것말고 또 다른 사례를 보자.

이 경우는 학창시절 모범생이 었다. 그런데 사소한 이유로- 그냥 "여성적이라서 재수없다." 는 이유로 누군가의 주도에 왕따가 시작이 되었고, 그 사건의 중심에서 표적이 되면서 성적도 떨어지고 난리가 났다. 그러나 이 모범생은 구체적인 사례를 말하기는 비참하고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기 싫어 수차례 부모님께 "전학을 가게 해달라." 고 호소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부모님은 티없이 맑고 구김, 흠없는 인생을 원하셔서 "절대 전학은 안된다." (전학조차도) 인생의 오점을 남기는 일이라고 극구 반대하시고 적응을 요구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도 왜 성적이 떨어지느냐고 다그치는 사이에 왕따가 자행되었고 일년동안 이 모범생의 삶은 피폐해져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할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단지 "전학을 가지 말아야 한다." 는 부모님의 경직된 아집이 결국 학생의 정신을 망가뜨리고 말았다.

자기의 상황과 생존은 사실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 그건 진화역사속에서 내면화된 자기 생존본능이다. 설령 "학교를 그만두겠다." 하더라도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한다." 는 부모님의 아집과 주장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보장이 없다.

만약 그 사람이 학교와 같은 환경에서 평생 적응을 하여야 하는 사람이라면 학교를 계속 다니는 것이 맞다. 그 대신 거기에 대한 대안이 있어야 한다. 괴롭히는 쪽들에게 원인이 있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쪽에 원인이 있을 것인데, 괴롭힘의 행위 자체는 부당하나 인간사의 인습적 측면에서 만약 괴롭힘을 당하는 쪽에도 개선할 문제가 있다면 그런 조언을 하고 개선을 시켜주고 하는 것이 옳지만-예를 들어서 "범죄자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고 하지만 사실은 범죄자를 비난하는 것을 막아주지 못한다.- 보통은 대다수가 괴롭힘을 자행하는 쪽이 부당하고 원인이 있게 되므로 만약 그런 뿌리를 잘 통찰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부모님이 틀린 것이고 학생에게 원인이 없다면 그 학교를 다니지 말고 차라리 다른 학교를 다니게 하거나 검정고시를 치루게 하는 식의 방법을 제시했어야 옳다.

왜냐하면 인간 삶이란 인간의 자유와 역학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과도 개입하고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이라든가 시간이라든가 유전자 조합 등 수많은 우연이 작용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인간이 모두 통제할 수 없으므로 단지 대응의 능숙함이 요구되는게 인간의 삶이다.

그것으로 막지 못하는건 인간이 막지 못하는 것이니 당연히 신이 책임지고 맡아야 할 부분이다.

(신이 있든 없든 그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그게 인간의 생의 현재로서의 삶과 세상의 모습에서의 최선인 것이다.)

반대의 사례를 보겠다. 어떤 한 학생이 어릴 때 부터 TV에 많이 노출되며 자신의 모습도 모르고 TV속의 연예인과 자기가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어린 판단에 무조건 "연예인이 되겠다." 는 생각으로 학교 공부도 소홀히 하고 학교 자퇴를 원하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만을 좋아하며 합리화 하였다. 그런데 그 학생은 결국 자퇴를 하였으나 연예인이 되지도 못하였고, 검정고시도 실패했고 그냥 이도저도 아니게 살다가 일용직을 전전하였다.

그런데 "일용직을 전전하였다." 는 사실에만 집착하여 "그거봐 그러니까 그렇게 인생 실패하잖아." 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그 학생 당사자는 "공부라도 할걸..." 하고 후회 할 수는 있으나 그 학생이 설령 공부를 하고 성실히 살았다고 한들 "졸업후에 대우를 받으면서 행복하고 원하는 것을 충족하며 살것이다." 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럼 그 사람은 현실을 모르고 현실의 디테일을 모르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내가 면밀히 개개인의 사례를 관찰하고 조사하고 오랜기간 통찰 연구 추적 종합 해본 결과 그렇게 학교 공부 충실히 하고 산다고 하더라도 대다수는 적당한 대학에서 적당히 원하는 것을 얻으며 정작 자기가 원하는 것과 차이가 있거나 아닌 직장에서 햇빛도 못보고 일하다가 나이를 먹어 자기가 그렇게 원하지는 않는 그런 자기가 생각하기에, 자책하기에 "그저 그런" 인생을 살며 군중속에 묻어가다가 늙어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런 인생이 틀린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저마다의 인생은 다 가치가 있고 행복할 수 있고 나도 소시민의 삶을 행복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핵심은 "자기가 원하는 것" 을 못하고 산다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인간이 행복한 것에 일용직을 전전하는 사례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 - 하여 제로가 되는 상황인데 만약 연예인을 지망하며 빛나는 10대를 보내다가 그 후에 30 대부터 일용직을 전전하고 근근히 살아가는 인생과, 10대를 희생하고 부모님과 소위 인솔자, 지도자들의 말을 듣다가 그저그런 별다른 재미도, 흥분도 없는 인생을 살며 소일하다 보니까 늙어버린 인생 어떤 인생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개인의 문제겠지만 말하자면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한참 재미있다가 폐지 주으러 돌아다니는게 나은가, 아니면 돈은 받지만 내내 공장 기계만 돌리는게 나은가 하는 것과 같다. 말하고자 하는건 사실 그게 그거라는 것이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일용직을 전전하였다 한들 10대를 가졌다. 그러나 10대를 잃어버리고 자기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산다면 그것은 누가 보상해 줄것인가? 지금이라도 아는 자가 깨달아서 바꾸어야지, 그것은 제도의 오류와 모순이 방치시키고 희생시키는 개인의 현실이다. 그러나 많은 자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설령 알아도 잊혀져 버리는 개인의 과거이다. 잘못된 인간의 상품화와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그렸듯이 인간의 도구화로 인한 잘못된 본질 이해이다. 인간이 현대에 그런 역할을 하고, 또 그냥 물질 덩어리인 뇌가 착각하는 임장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또 설령 원숭이에서 진화한 개체라 하더라도 인간이 존엄하지 않은가? 그건 아니다. 존엄하다. 그건 인간이 존엄하다 하기 때문에 존엄하다. 그것이 바로 실존이다.

마치 사랑이란 감정은 자연이 생식을 위해 만들어낸 신기루일 수 있어도 인간이 진실된 사랑이라 하기에 사랑은 진실될 수 있다. 마치 인간이 진심이라 하기에 진심이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이 "실존" 이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행복이라 하기에 행복은 존재한다. 자연은 재료를 제공하고 인간은 그걸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고 느끼고 먹는다.

그러면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실은 인간의 행복이란 별반 차이가 없다. 인간이란 존재가 지구상에서 생겨나서 두뇌란걸 형성하고 유전자에 의해 매력을 느끼며 인간 구성체로써 살아가면서 생존, 적응하며 행복, 불행 혹은 쾌락, 불쾌로 형성되며 느끼고 울고 웃고 살아가는 뇌의 입장에서 보기엔, 사실은 인간은 따뜻한 햇빛을 느끼며,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사랑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울고 웃고 나누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도와주고, 때론 싸우고 자신의 이익을 찾고 권리를 관철하며 등 인간이 경험적으로 "행복하다." 고 느끼는 그런 모든걸 하고 살때 사실 제일 행복하다. 그리고 거기에 진화심리적으로 인간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건 "쾌" 아닌것은 "불쾌" 로 새겨지는 것이 기본이나, 인간의 오랜 전쟁역사로 오히려 파괴가 행복이 될 수도 있는 구조가 발생할 수도 있는 그런 부분도 있다. 또한 베풀고 사는 것이 행복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시스템에 뇌가 속고 있는 부분도 있다. 현실 임장이란 착각에 의해서.
또한 매력이란 것도 포함이 되어 당연히 매력있는 사람이 보상이 더 충족되는 것은 사실이나 매력이란 것은 주관적이고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서 착한 사람이 매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단지 친한 사람이 매력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라 그 문제는 경험에 따른 다고 정립하겠다.

그러한 것들을 하고 살 때 "행복" 한 것인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과연 "시키는 대로" 하고 살면 그렇게 되느냐는 것이다. 그건 이미 자명하게 "아니다."

선생님도 못그러고 살고, 기성세대나 어른들, 기존 제도를 주장하는 자들도 대다수 행복에 많이 근접해 있지들 못하다.
돈이 많으면 그걸 이룰 수 있는 가용력은 높아지나 돈자체가 그걸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한 예로 인간이 행복한 것중 하나가 잔치를 하고 축제를 하는 것이라는 통계가 있는데 그런 잔치나 축제가 사람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라는게 드는데 정작 자신의 자식 분유값 하나도 지불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게 가능할 것인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럼 도대체 행복하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그냥 "기성 세대" 나 타인의 목소리를(그자의 욕심과 개체 유전자의 욕구와 권력 시도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듣지 않는 것만으로 그게 실현되는가?

여기서 "자기" 라는 존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나" 도 그런 존재라는 것을.

"나의 욕구" 를 들여다 보고 사실 그것이 기존에 부합되면 그냥 기존것을 어기든 말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상충되는 경우는 쾌락 원칙, 현실 원칙 이나 에고, 아이디의 충돌 등의 개념이 다루었듯이 기존에서 다룬 것은 그런 다른 자와의 조화나 타협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 책에선 그런 관점에서 말하는게 아니다. 그런 본능과 이성을 모두 이용한 욕구실현의 충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옳은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면" "말을 안들어야 한다." 고 주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꼭 말을 들어야 한다가 아니라, "말을 안들어도 좋다." 도 아니며, "내가 옳다면 말을 듣지 말고 내 뜻대로 해야 한다." 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성공할 확률도 높고, 더 행복에 근접해진다. 그러나 주의하고 괘념할 점이 있다.

한가지 사례를 보겠다. 유흥가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한 무리의 애들이 일부러 심심풀이 혹은 스트레스 풀이 목적이었는지 지나가는 놈들을 보면서 '먹잇감' 을 구하고 있었는데 한 겉으로 보기에 우스워보이고 '만만한' 애가 지나가자 시비를 걸고 집단으로 구타를 하였다. 그러다가 야간에 특수폭행으로 구속이 되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오히려 "기성" 의 말을 어기고 자기 욕구대로만 한 경우이다. 그런데 이 경우의 말로는 파국이다. 그러면 단지 자기 욕구대로 하느냐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이 결정할 문제라는 것인가? 아니다. 여기의 본질은 "몰이해" 이다. 말하자면 "자기대로" 하느냐 "기성 말을 듣느냐" 는 모두 세상에 대한 또는 상황에 대한 옳은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런 철저한 이해 없는 행동은 뭐든 성공가능성이 낮다. 그러면 "기성" 이 단지 몰이해라 그런 안좋은 결과를 만든 것은 아니냐? 그렇다. 역시 "자기 뜻대로 하는 것" 은 기성보다 자기가 더 이해도가 높고 완전히 상황을 더 낫게 할 수 있을 때만 그런 욕구를 행하여야 하고, 또 그게 확실할때는 밀고 나가는 것이 자기가 원하는 것에 근접한 다는 것은 수많은 사례를 통해 증명되어 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수로 성공한 사례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상황이 있다. 군대인데 상사의 명령을 어기는 경우 큰일 난다. 영창을 가거나 전쟁중이라면 총살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례가 있다. 군대 동기와 그런 대화를 했다고 한다. "전쟁나면 어떻게 할거냐?" 보통 과시욕으로 뭐 같이 싸우겠다 어쨌다 하는데 실제로는 "그냥 튀지 미쳤다고 싸우다 뒤져...누군지 알고..." 그런식의 반응이 진심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식으로 전쟁이 나면? 실제로 싸우거나 동원이 되어도 군법에 어긋나건 말건 도망가는 군인들이 많다. 그런데 희안한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가 아니라 실제로 도망간 자들이 살더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도망가라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군대와 원리는 다르니 군대는 제외하도록 하자......

사실 전쟁이 나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 인간이 조절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전체를 보고 움직이지 못할 뿐이고, 인간의 능력의 한계였을 뿐이다. 또 수많은 인간들이 세계를 조절하려다가 보니까 과거의 과오를 시간이 지나면 바꾸기 힘든 경우도 많다. 그런 결과이고, 사실은 전쟁이 부당하게 났다면 철학적으로 볼때 전쟁에서의 살인은 살인이 아닌 것이 아니다. 전쟁에서의 살인도 살인이다. 그러나 죄를 묻기 보단 죄를 짓지 않게 만들지 못한 주체가 뉘우쳐야 하겠지만 그런 주체가 누가 있는가? 그건 아마 신이 뉘우쳐야 할 것이다.

-현재는 개체에게 모든 죄를 전가하지만 실은 그러한 죄를 짓기 까지의 인과라든가 구성이라든가 그걸 개인이 모두 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기 때문에 전적으론 옳지 못하나 편의상 근시안으로 그렇게 할 따름이다. 개인이 인식하고 정보처리 하지만 개인의 통제력 만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마치 인간의 인생은 모두 바다로 가는 강의 물살에 떠밀리며 노를 저어 배를 늦추거나 곁길로 빠지거나 암초를 피하거나 다른 물길로 가는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종착역은 바다이고 그 이전에 그 노젓는 능숙함으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지언정 괴로울 수도 있고 또 그런 노젓는 실력의 능숙함과 미숙함을 결정하는 것은 다른 배를 인식하여 노력할 수도 있지만 그냥 계기나 운이 될 수도 있고-원인도 모를- 자신들이 바다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꽃구경에 눈이 팔릴 수도 있고 배가 난파하기도 하지만 사실 모두는 바다로 간다. 그래서 바다로 가기 직전에는 모두가 알 수 있긴 하지만 그걸 모를 수도 있고 그냥 강에 빠져버리기도 한다. 인간은 그걸 피할 수 없는 숙명이고 죽음을 미리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죽음' 에 대해 미리 생각한다고 피할 수는 없지만 웰다잉(Well-dying)할 수는 있듯이, 또 신은 그걸 계기나 인과성으로 깨닫는다 하더라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실은 인간이 신의 장난과 놀음의 몰모트라도 인간은 신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하고 현존을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


그런데 사실 내가 말하는 현실과 이 세상의 실체는 좀 다르다. 인간의 본질이나 세상 자체가 불합리한데 그것의 조화와 병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로섬 게임" 과 같이 불합리한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개선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그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역설이 있다.
윈-윈을 위해서 타협을 해야 한다는 것이 기존의 주장이었다. 말하자면 이번에 내가 반을 먹을테니 당신이 다른 반을 먹으시오라고 타협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진정한 윈-윈을 위해서는 모두가 자기 뜻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타협을 서로의 이득에서 한발짝씩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 여기서 나도 원하는걸 하고 당신도 원하는 것을 하시오. 라는 것이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말하자면 전쟁을 하면 휴전선을 긋지 않고 나도 당신 땅을 가지고 당신도 내땅을 가지시오 라는 것인데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당연히 아니다.

다만 그 답은 "인간의 뇌자체" 에 있는데 인간의 마음이란 자연이 뱉어놓은 대로 현재 시공간에 매여 "가능성" 대로 작동을 하고 살고 또한 욕구 보상 회로가 굳어져 바꿀 수 없을 듯 하지만

만약 그것을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처음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지금까지 그런 생존이나 욕구, 어쩔 수 없다는 상황을 고착화 시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여객선에서 "먼저 나온 사람이 산다." 는 물리적 현실만이 아니라 여객선 자체가 구명조끼를 충분히 구비하고 있었고 아예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가능성" 을 사회전체로 확장시켜보면 어떨까.

아예 자본주의라는 이념이 없거나 자본가가 없고 모두가 공평한 재산을 가지고 있고 모두에게 기회가 있거나 아예 외모지상주의 조장이라든가 비교의 시도를 인문적으로 조절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면?

그것이 당대의 유토피아이다. 전쟁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단지 인간의 후천적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일까? 아니다. 아니면 역설적으로 다시 제도라는 개념을 끌여들어 누군가의 "지도" 가 있어야 가능한 일일까? 역시 아니다. 자가당착이 되어 버린다. 그래도 해결이 된다면 모르지만 그게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나는 이 원리를 스스로에게 이 책에 적용하여 다른 돌파구를 찾아 보겠다. 이 것이 나란 개체가 적으면서 펼친 나의 생각이라면 다시 생각으로 돌아가서 "과학" 으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과학이 희망이다.

그것의 기원이 인간의 "뇌" 라면 인간의 뇌를 바꾸면 그게 사라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현대에 이루어 지고 있는 인간의 폭력성과 본능에 관한 연구에 지지를 보낸다. 또한 인간의 뇌자체를 바꾸는 작업, 사실은 그것이 자연의 실수와 신의 설계오류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작업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인문적인 것과 후천적인 여러 시도가 중요할 수 있지만 이런 관점에서 "인간 자체의 오류" 와 "당대" 라는 한계-시간이 지나야 발전한다는- 를 구조적으로 뛰어넘기 위해선 필요하고 절실한 작업이 그것이다. 그래서 사실 현재, 지금의 열쇠는 과학에 있다. 그래서 과학에 바톤을 넘겨주고 싶은 마음이다. 과학이 살린다. 가타카가 재앙이 되지 않길 바라며 이 책을 마치는 바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학생이 자퇴를 하겠다는 상황을 말하기 이전에, 이미 충분히 많은 선험적 정보로 학교에 왕따가 있고 그것을 방치하거나 혹은 인간 뇌의 오류와 인간 본성의 추잡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역시 서로의 이익이 결부되어 방치하여 왔다.

그것을 법제화 제도화 하는게 그나마 현재의 인간의 최선의 해결책이다. "어 그러면 앞에서 말한 '남 말을 듣지 말라' 는 것과 모순되는 것 아니냐?"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건 이 책을 이해를 잘 하지 못한 말이다. 남 말을 듣지 말라" 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나의 주장을 견주어 보고 내가 옳을 때, 어차피 각자의 욕구가 얽혀 있고 진화의 장난이므로 그냥 자기가 하고픈걸 해라-다른 자에게 피해를 안주는 상황같은건 얼마든지 있다. 역시 '자유의 가능성' 의 세계라 이를테면 자퇴를 하여 더 성공한다면? 아마 진짜 부모님이 원하는 모습과 자기가 원하는 것도 충족한 윈-윈일 것이다. 그런데 부모님이 당장 그때 원하는걸 지키려다가 결국 자기도 망가지고 이도저도, 죽도 밥도 아니라면? 그거야 말로 한번 인생 배려버린 것이다. 이미 지난 시간은 되돌리기 힘든 구조이고, 현재 가는 시간도 잡기 힘들고 현재 미시계에서 가는 시간이 왜 구성상태의 현재에 이렇게 반영되어 나타나나 하는 문제도 현재로썬 잘 모르는 문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은 '인과' 나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도 있지만 구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나 자유의 여지도 있고 가능성도 있고 이렇게 정보처리를 하고 있다는 자체도 단지 인간과 인간사이의 신호 교류일 수 있으나 그것이 분명히 인간으로써 우주내의 최선으로 도움을 주고 "한 개인" 의 인생을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단 점에서 의의가 있고 가치가 있다. 그렇게 따지면 우주란 자체나 물리학의 지식도 우주란 자체가 사라지면 무의미한 마치 "색즉시공 공즉시색" 처럼 인간이란 존재에게만 투영된 허상이라면, 단지 인간의 두뇌가 이해가능한 부호로 표시된 지식체계이고, 심리학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고-물론 이것도 '계기' 가 있어야 하고 인과로 접하거나 깨달아야 하지만- 마치 데카르트가 마지막 생각하고 있는 자신은 부정할 수 없었듯, 부정하기 힘든 실존 그자체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있다." 고 믿고 자기 개선을 하면서 사는 것이 이 세상의 인간들이 발전시켜 문명을 이루게한 원동력이기에 쭉 그렇게 살자. 그것만이 인류의 장및빛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왜 장및빛 미래여야 하는가? 하지는 않겠지. 그건 인류의 실존을 부정하는 말이다. "아직까지는." 그런데 미래에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건 미래에 아닌 거겠지. 아직까지 이안에선 '진짜' 다. 그게 결론이다. 현재진행형
만약 끝나고 거짓이라면? 그건 끝나고 이다. 지금은 진실이다. 이건 참거짓을 밝히는게 아니라 그땐 진실이고 끝나고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 당연히 있을 수 있다. 상반된 원리는 공존할 수 있다. 이것이 철학적 추상원리 자체의 불확정성 원리이다.

인간은 정보처리를 하고 사유한다. 그래서 자유가 있다. 그것이 신이 부여한 '신의 선물' 이다.

내일 일은 잘 모른다. 그러나 대응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간 인간이 축적한 것과 인간의 사유와 정보처리로 최대한 완성하려고...... -인간이 허공에 인간이란 구조가 있고 생겨 그게 실존이고 그렇게 생각하고 인간이라 인식하는 것처럼 인간의 존재는 상대적일 수 있고, 혹은 그 자체가 어떤 이유가 있는 절대적인 실존일 수 있지만 어쨌든 그 안에서 -시공간내의- 인간은 그자체가 실존이고 단지 그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노력한다. 이게 인간의 최선의 책무이다.

맺음말

"자기가 옳다면 말을 안들어도 된다." 그런데 그것이 제도 자체가 불합리한 것에 대해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자기 생존에 유리하니까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꼭 피해를 준다는 말도 아니다. 그것이 도이다. "되니까 한다." 는 식의 도...
말하자면 그렇게 하면 안되기 때문에 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된다는건 도덕원칙 이전에 이치의 원리이다.
예를 들어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으면 살이찌고 혈당에 나쁘니까 많이 먹으면 안된다. 그런데 천수를 다하고 늙어 죽기 직전이라면? 많이 먹어도 된다. 절대적인 원리란건 상대적일 수 있다. 심지어 사라지고 존재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다. 아원자처럼.... 이것이 철학적 원리의 불확정성이다.

다른 사람의 실수도 마찬가지고 나의 이런 책도 다 인과가 작용하고 뇌가 작용한 결과이다.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하는 것도 사실은 어차피 배고픈데 밥은 왜먹어처럼 어차피 죽는데 왜살아처럼 그런 것이고 인간은 자유가 있기에 불가능한게 아니다-지금까지 잘못된게 절대적인 인과가 아니라 자유의 영역도 있으므로 단지 시간이 지나서 되돌리기 힘들뿐(또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구조상 가능한 것도 있다. 특히 생각안에서만 일어난 건) 자유가 없는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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