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6일 일요일

왜 그때 그럴 수 밖에 없었는가 인간 자유의지에 대하여

왜 그때 그럴 수 밖에 없었는가 인간 자유의지에 대하여

누구나 살다가 ‘왜 그때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후회를 하게 된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시공간 구조나 사람 마음상 돌이키기 힘든 일도 많다. 나는 이런 이유를 밝히고 인간이 그런 후회할 행동을 안하고자 이 책을 썼다.

인간에겐 자유가 있을까?

내가 지금 생각하고 활동하고 살고 ‘원하는대로’ 하고 있으니 왜 자유가 없는가? 할 수도 있지만 과거에 원했는데도 못했거나, 아니면 그게 ‘자기’ 로써 구성된 신경의 명령이거나 다른 사람의 심리가 시킨 일이였거나 본능 욕구의 발현이 아니였던가? 그럼 “자유의지” 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과거 철학자들의 의견을 보겠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필연적인 인과로 인한 결과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과거의 인과가 있기에 현재의 자유발휘가 있다는 것이다. 자유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의견이고 ‘결정론’ 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칸트는 인과율은 현상계를 지배하는 법칙이고 실천이성은 자연으로 부터 비롯되지 않고 영지계에서 부터 비롯되는 것이므로 의지의 자유는 자기 자신에게 도덕법칙을 부과하고 그것을 따르는 의지의 자율이므로 자유의지는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헤겔은 칸트는 아직 주관적이고 유한적인 자유의지에 머무른다고 진정으로 무한하고 자유로운 의지는 즉자적이고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의지이고 그것은 의지의 형태로 자기를 관찰하는 사고이고, 자유라는 것도 사실 인식되는 필연일 뿐이라고 했다.

또 과학적인 관점에서는 인간의 두뇌는 그냥 인과를 정보처리하고 전전두엽으로 자기를 조절하는 두뇌로 본다. 물론 문화적인 것들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할 수 없던가 하는 일상적인 이유들이나.

그런데 자유의지는 결정되었다, 아니면 자유의지는 존재한다 그런 의견이 철학계에서 오랜 기간 팽팽히 의견대립을 하였는데 나는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는 뜻에서 과거 철학자들의 의견을 비판하지 않겠다. 나부터 비판하지 않고 모두의 의견을 존중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과율로 인해서 이루어진 ‘선택’ 이든, 스스로에게 부과한 도덕법칙을 이행하는 ‘자유’ 이든, 그리고 사유하는 자신을 인식하는 자신도 인과에 의한 것이건 초월이성이건 간에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내방식대로 분류를 해보자면. ‘현상계’ ‘영지계’ 그렇게 나누지 않고 인과율은 현상계와 과학적인 관점에서의 두뇌, 그리고 자유의지나 생각을 하는 자신이나 인과자체를 인식하는 자신, 그런 모든 것을 관통하여 걸쳐있으므로 ‘인과율’(인간 내외 모두 포함) 인식-‘본능’,’타성’, ’자유의지’ 로 구분해 보겠다.

인간은 ‘본능’ 과 ‘타성’ 그리고 자유의지가 있다.

중요한 몇가지 질문을 해보겠다. 그것이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문제를 푸는데 중요한 열쇠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과연 존재하는가?

인과로 인해서 제한을 받는 상황을 살펴보자.

1) 시공간 자체의 이유

인간 인식상 일상계에서 시간은 흘러간다. 그런데 그것이 물리학적으로 시공간의 특수한 굴곡에서는 과거나 미래나 현재가 원자 차원에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타임머신 이론의 근거이다. 그러나 일상계, 특히 ‘인간’ 이란 구성된 차원에서는 인간 일상으로 볼때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이미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동시성의 착각]

[여기서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이 ‘동시성’ 인데 사실 나의 의견으로 볼때 ‘동시성’ 이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든 산물이나 인간의 자유에 따른 행동의 결과-공간을 걷는다든지 하는 그런 ‘찰나’ 를 시간적 좌표로 봤을때 공간적으로 각기 다른 행동을 하기에 ‘동시성’ 이라 착각을 할 뿐이지, 사실상은 ‘동시성’ 이라기 보단 단지 흐르는 시간속에 다양한 행동들을 특정 좌표 기준에서 포착하여 만들어낸 인간 기준으로 해석한 개념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동시성’ 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나 ‘이미 지난 시간’ 을 어쩌지 못한다는 점에서 ‘과거는 절대적이다.’ 라고 단정하는 논리적 오류에 빠지나 사실 ‘지나간 시간은 절대 바꿀 수 없다.’ 는 말이 ‘지나간 과거는 절대적이다.’ 라는 말과 같은 의미가 아니고, 단지 수많은 가능성 있던 과거들중 하나가 동시성이란 좌표로 볼때 이미 지나간 시간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고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래서 ‘동시성’ 이라는 개념은 편의상 실용적인 것을 위해 써먹는 개념이지 일단 ‘이 세상 전체가 마치 찰흙덩어리처럼 한덩어리로 돌아간다.’ 는 생각 부터 해체를 하여야 한다.

그것이 인과율의 덫에 빠지고 더나아가 결정론의 오류를 범하는 근본 이유이기 때문이다.

(차후에 말할 것이지만 결정론의 덫에 빠지는 근본 이유중 하나가 개인의 무력감 때문이기도 하고 이건 시공간 자체보다는 사회나 개인에서 기인한 무력감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개인 감정이나 상태가 사고, 더나아가서 사상화된 위험한 케이스의 오류이다.)

그러면 ‘인간 구성 상태에서의 진리’ 를 추구하는 것이므로 일단 인간 일상계입장에서 시간이 흘러간다고 보겠다. 시간은 흘러간다.]

그런데 그 것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 일까? 앞서 동시성의 개념의 허구를 보았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은 아니다. 개개인에게 ‘저마다 흘러가는 시간’ 이 다르다. 예를 들어서 새로 아기가 태어나면 그 아기만의 ‘인생’ 이 생기고 그 아기의 ‘시간’ 이 흘러간다.  동시대에서 정보를 교류하여 노인 수준의 정보를 가질 수도 있지만 시공간 구조의 자연상태에서 구조적인 이유로 그런 것도 모두 인과율에 얽혀 평균 상식치가 높아지거나 인과율을 따르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므로 그것을 처리하고 겪는 주체는 결국 ‘시공간 속의 그사람’ 그 인간구조를 넘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일단, 일상 자연차원에서는 개인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보겠다.<차후에 말할 것이지만 이런 구조를 사회적으로나마 개선하면 모두가 자유를 획득하고 필요에 따라 엑기스의 전수를 통해 공동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인간은 저마다의 시간을 가진다. 적어도 일상계에서는 철학적으로 시간이 흐른다는 의미는 인간이 늙고 우주가 늙는다<순환을 하고 대사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상대성 이론과도 통한다.

그리고 우주 안에서 한덩어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부속품들은 근본 구조상 자유를 가진다. 다만 그것이 ‘인과율’ ‘본능’ 인간의 산물, 사회 문화적 환경, 상호작용, 인간 구조 특유의 작동성 등에 의해 많이 제한을 받는다.

그래서 ‘자유를 찾는 과정’ 은 이런 것들에서 해결을 얻는 과정이다. 해방-‘힘’(이조차도 구조에 대해서 상대적이나 특히 심리적인 힘이)과 직결

그러면 ‘인과율’ 은 무엇인가? 2)에서 이어지지만 인과율은 시공간 자체의 구조에서 파생되는 기본조건이 된다. 이를테면 인과가 생겨난 기본 토양은 ‘시간이 인간입장에서는 한방향으로 흐르는 우주 공간의 특정환경’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인간과 모든 만물은 이런 기본 바탕위에서 생겨났다.

2) 인과적(사회문화적인 이유, 관점 포함)

‘인과율’이란게 우주의 생성과 인류 사회의 진행과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일단 창조를 하였든 저절로 생겨났든 초기에 생겨난 ‘인간’ 의 씨앗의 입장에선 지구라는 환경에 맞게 DNA 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자기 구조화 하여 반영하기 시작했고 오랜 시간동안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자기 내부에서 정보전달이 일어나고 신경대사가 일어나고 타 개체 ‘타인’ 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그것으로 산물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또 얽혀서 다양한 ‘인과’ 를 통해 ?물론 동시성으로 포착하여 사진을 찍으면 ‘한공간’ 에서 일어나는 한컷으로 나올 수 있으나 그것은 동시에 일어나도 공간적인 인과성을 가질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관계는 그렇다. 일상적인 인간에겐 ‘연속컷’ 으로 느껴지기 때문이고 문제해결을 위해서 내가 따지는 방식도 다양한 원리로 연결되고 ‘시간’ 이란 환경속에 공간적으로 확대=자라난 인간이란 구조체를 중요하게 고려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에 관한 것- “인류역사” 라는 것이 생겨나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리고 그안에는 완전한 자유는 아니라도 간헐적으로 자유의지가 있었기에 ?물론 이론 적으로는 단지 인과율에 따른 정보처리 만으로도 현대 인류 문명이 가능하나 (“인간입장에서 대단하고 좋은 것” 이니까) 인간 인식이 궁극적으로 발전하면 정확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진리를 찾아 쌓아나가는 탑이 철학이기에- ‘이변’ 이 있었다고 본다. 단지 확률론이나 통계론을 넘어서 순수한 ‘자유의지’ 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경우가 생긴다.

[‘확률론’ 의 본질- 예를 들어서 ‘사살될 가능성이 높은’ 유태인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을 ‘확률’을 따진다면 상당히 낮은 확률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유태인’ 그리고 그 군인들은 사회주의-자본주의로 대변되는 초기 사상을 기반으로 모인 ‘사람들의 집단’ 그런 ‘두뇌 심리’ 를 거친 ‘심리에따라 움직이는 육체’ 들의 집합 이라면 그런 조건들을 모두 봤을때 결국 ‘인간
구조’ 나 ‘인간군집’ 라는 것 내에서의 ‘확률’ 이고 만약에 그런 조건을 모두 없애거나, 아니면 그것을 초월하여 본다면 그런 ‘확률’ 이란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 사회 밖에서 돌이 사살될 확률’ 은 0% 인데 그것이 ‘인간에게’ 의미 있는 ‘인간만의 개념’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확률’ 이란건 인간의 두뇌를 넘어서면 논의하는게 무의미해 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주내에서 운석이 충돌할 가능성’ 을 따지면 인간에게 생사가 걸린 중요한 의미이고 이런 성격때문에 앞서 말한 본질이 흐려질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운석이 충돌할 확률’이라는건 존재하지 않을 수 있고 생물체나 인간에게만 의미있을 수 있는데 지식의 개념이라는게 이런 식의 것이 많고, 또 나는 인간입장에서 실용성을 기준으로 하기에 이런 개념도 중요하게 채택을 하지만 사실은 실존의 입장에서 실재하는 것, 실재하지 않는 것은 구분될 수 있다. 또다른 관점에선 ‘모든 것은 실재한다’ 혹은 ‘실재하지 않는다.’ 할 수 있지만 그런 논의는 과외로 한다. 어쨌건 인간은 생각하기에 고로 존재한다-데카르트-그래서 지금의 생이 일장춘몽이건 호접지몽이건 어쨌건 우린 지금 생각하고 이 산물이 실재하건 안하건 우리에겐 실재하므로 단지 여기서 우리는 이선에서 소통을 하고 지식과 진리를 추구해보자는 것이 결론이다.]

그래서 “확률론 의 본질” 에서 말한 관점에서 ‘자유의지’라 명명한 개념은 실존한다고 이번 궁구에서 분류를 해두었다.

그래서 ‘자유의지’ 까지 들어간 ‘인과율’ 로 인해 현재 핸드폰도 사용하고, TV도 보고, 인간에게 의미있는 책도 만들고 상호소통도 하고 음식도 만들어 나누어 먹고 건축 기술도 발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게 하나로 어우러져 인간이 인식하기에 그런 “현대 사회” 를 느끼나 그것이 모든자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 분배의 문제 이전에 인과율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책이 나오거나 법제화가 되거나 금전의 흐름도 결국 ‘인간’ 이나 ‘인간의 산물’ 을 거쳐야 하고 특히 인간 자체는 구조적으로 ‘인과율’ 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이것에 대한 해방이 진정한 궁극적인 유토피아를 가능하게 만든다. 쉬운일은 아니나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말하자면 원시무법사회에서 현대제도화된 사회로 도약하여 범죄율이 감소하였듯이 그런식으로 극복, 도약 가능한 패러다임이다.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작은 사상에서 시작하였듯이 새로운 인간이나 유토피아도 가능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인과율’ 이 긍정적인 일만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온갖 부정적인 것들-역사상 전쟁이나 인간 실책으로 인한 과도한 일들 인간 DNA 두뇌 회로화된 부정적인 감정들과 차별, 소외, “인류는 멸망해야 한다.” 한다는 비관론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내고 긍정적으로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도덕률로 잘사는 사람들까지 피해를 주어 다같이 공동체를 침잠을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 지금도 그런 ‘인과율’ 에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만들어 지고 있고 그 “인과율” 의 영향을 가장 많이, 절대적으로 받고 반영하는 것도 ?아까 “인간은 제각각의 시간을 가진다.” 했던- 바로 인간 생물체이고 인간의 두뇌이고 인간의 인식이다.

그래서 ‘시간’ 에 따라서 ‘인과율’ 을 만들어내고 가장 많이 산물을 만들고 반영하고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인간’ 인데 또 그 특유의 복잡한 인간 두뇌와 작동 방식에 맞추어 자의던 타의던 제3의 이유이든 다양한 인간사회를 만들어 내거나 흘러온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할 점은 바로 그 ‘불합리한 점’ 인데 ?단지 인간이 심리적으로 부정적이거나 위협에 대해 반응하는 심리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만약에 긍정적인 결과만 나고 ‘인간 두뇌 구조상’ 행복하고 보상충족 되는 일만 나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한평생, 100년인생에 설령 철저하게 로보트로 자유의지가 없어도 인과로만 모두가 행복하다면 굳이 자유를 얻을 필요성이 인간 두뇌발생적으로 여지가 적을 것이다. 굳이 행복하고 원하는걸 얻는데 불행해질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 못한다는데에 이유가 있고 그로 인해 생,로,병,사의 이유를 탐구하거나 인간이 자유로워져서 인과를 다룰 방안을 탐구하게 된다.

단지 인간이 자유를 얻는 것만으로 그런 불합리한 점을 개선하고 흐르는 시간속에 당대에 원하고 충족하고 행복을 영위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으나 잠정적으론 가장 근원이 그것이라고 보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자유였던 것이다. (자제력 강한 부자도 파산을 막을 수 없다.) 돈은 자유의 부속품이다.

그러면 그 ‘인과율’ 이 만들어 내는 그런 다양한 것들, 다양한 작동-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것:이것도 인간 공동체를 거치면서 진화 역사상 욕구가 생기고 단련 강화되고 ‘긍정’ ‘부정’ 이 ‘쾌’ ‘불쾌’ 로 나뉘어 지면서 결국 인간에게 충족하는 인간인식문제라는 점이 있지만 자기 충족이나 ‘행복’ 을 누리지 말아야 한다, 아기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의지를 없애고 ‘인과(업)’ 자체를 없애야 한다 는 식의 철학적 결론은 마치 자살과도 같고, 인간의 실존 자체를 위협하므로 일단은 “인간의 생존” 은 존속하여야 한다고 보고 그것을 개선하겠다는 통상적 방향에서 얘기해 보려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논리적으로 옳다 하여도 범죄를 합리화 할 수 없고 어떤 경우에도 옳지 못한 것이듯 황금률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이 만들었든 진화의 산물이든 인간 자체가 다 사라질 방법이 있어도 인간 자체가 사라지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적어도 어린이가 여자 친구에게 차였다고 자살을 하지 말라고 하는 말과도 같다. 통상적이지만 모든 철학과 인류 역사를 통틀은 지혜를 담고 있는 것이고 다른 지식으로 정신이 흐려져도 잡아야할 푯대, ‘중심’ 이다.

그러면 그 ‘인과율’ 의 본산지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인식, 두뇌를 보겠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일단 내용과 사정을 잘알 수 있는 철학적 관점으로 옮겨 놓고 본다면 일단은 그런 두뇌 구조로 인한 ‘인과’ 예를 들어서 본능적 욕망이라든가 화, 분노, 성격의 반영된 말과 행동, 인간의 공통적 특성과 문화적 정보처리의 산물의 내용,… 등 다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분석하고 통찰, 해석해 보면 인과율로 인한 것이 상당수이고 과거가 영향을 미치는 것도 있고, 단지 그냥 두뇌에서 나오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원인’ 을 가지고 그 산물은 ‘결과’ 라 할 수 있는데 이유없는 표출처럼 ‘원인’ 과 ‘결과’ 가 물론 한몸으로 나오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도 ‘원인’ 이라 할 수도 있고 ‘결과’ 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산물의 대다수가, 그리고 전체 인구중 대다수가 “자유의지” 를 거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일부의 산물이 자유의지이거나 전체 인구중 극소수만 자유의지의 비율이 높거나 칸트의 실천이성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런 모든 사람들이 공간이란 곳에서 하나의 “사람” 이나 “대중” 으로 보이기에 혼란해 보이는데 근본적으로 나는 개개별 개체는 상호작용과 인과의 영향을 받으나 때론 분리해서 깊이 통찰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사실 바람직한 인간상은 그러한 “불합리하고 잘못된” 부당한 인과의 산물들이 아예 발생하지도 않고, 또 발생하더라도 그것을 완벽하게 걸러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 인간 구조라고 본다.

만약 모든 인간이 다 그러면 어떨까?

나의 유토피아 사고실험에서 실제로 그런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을 시뮬레이션 했는데 결코 로보트도 아니였고, 인간 사회의 부정적인 것이 없는 완벽하게 긍정적인 유토피아였다.

예를 들어서 인간의 화를 내지 않는다. 자신의 아들을 폭행하지 않는다.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도둑질 하지 않는다. 남의 재산에 대해 나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절을 지킨다. 절대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어떠한 행동을 자유롭게 해도 결코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공자님과 같은 사람이라면 실수조차도 너그럽게 받아주고 고쳐주고 능력까지 완벽하게 완성되도록 도와준다면 현재 같은 인간 사회의 폐해나 그늘없이 모두가 행복한 이상사회가 될 것이다. 행복하게 해주는 중요 변수는 돈이 아니라 자원과 산물을 어떻게 배분하느냐, 또 사람사이에 오가고 파동을 일으키는 그런 것들이라고 판단한다.

그런 것으로 볼때 자유의지가 인과율에 저해받지 않고 깨어나서 철저하게 “(긍정적인)자유의지대로만 작동하는 인간” 이 되는 것은 인간 진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점이라고 보고 여기에 인류사회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이론적인 유토피아가 현실화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인간 자체” 에 있기에 인간이 변하면 인간공동체도 변하고 그 산물(빌딩, 음식, 생필품 등)과의 어우러짐을 한번에 인식하는 현상인 “유토피아” 도 저절로 구성되고 존재할 수가 있게 된다. 다툼, 미움이 없고 사랑만이 가득 차있는.

그러면 그런 ‘불합리한 인과율’ 을 어떻게 없앨까? 그것은 일단 두뇌부터 생물학적으로 바꾸어 DNA조작으로 폭력성을 없애거나 긍정적인 행동을 하면 행복한 보상이 되도록 인간의 뇌를 바꾸는 수도 있겠지만 본능 자체가 나쁜 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부정적인 감정이 나지 않도록 그것에만도 한계가 있다.

만약 ‘자유의지’ 로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할까? 그래서 이부분이 신이 남겨두고 부여한 ‘자유의지’ 부분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인과라든가 불합리하다. 흘러 온 것은.. 그러나 만약에 인공지능 컴퓨터 생물체를 개발한 인간이 최악으로 부도덕하나 어쨌든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통해 컴퓨터 내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인공지능 생물체를 개발하여 컴퓨터 내에서 살게 만든다면, 또 자기를 따르기를 강요한다면 아무리 불합리해도 또 컴퓨터내 프로그램으로 생겨난 ‘자기 자신’ 을 인식하고 ‘자유 의지’ 까지 가진 그 생명체가 거부를 하더라도 그 개발자에겐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삭제하거나 컴퓨터를 버려서 그 생물체를 못살게할 “힘” 이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의 상황이 이와 다를바 없다고 본다. 설령 나중에 그 컴퓨터 내의 생물체가 개발자보다 인성이나 모든 면에서 더 우월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죽음’ 의 권한은 개발자가 가지고 있고 근본적으로 컴퓨터 밖을 나와서 개발자에게 위해를 줄 수 없으므로 결국에는 ‘옳지는 않으나 힘은 있는’ 그런 상황이 된다. 거기서 컴퓨터 내의 생명체가 따르기를 거부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게 ‘정의’ 일 수 있으나 신은 자신이 기준이고 자기가 공의이다. 라고 했으므로 그건 개개별의 자유의지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증명을 떠나서 단지 분석만으로 “자유의지” 라는 개념의 명명은 필연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스스로를 인식하고 조절하는 상태” 를 붙일 마땅한 언어가 없다. 이것도 인과의 산물이다, 라고 해도 그렇게 따지면 “내가 지금 쓰는 것을 관두는 것” 을 그만 두고 아니고, 그것이 과연 인과의 영향을 받을 것인가? 하고 일주일 후까지 고민을 하건, 지금 당장 결정을 하려하건 행동 자체를 결정할 수 있는 지금 이상태’ 가 없다는 결론이므로 자체적으로 모순이 된다. 이조차도 ‘인과’ 라는 것은 두뇌를 단지 평면의 그림으로 보는 일차원적인 생각이다. 분명 ‘인과’ 를 넘어선 다른 구조가 있고 자유도 있다. 다만 자유가 제약을 받을 뿐이다.


[자유의지에 대하여]

“자유의지는 비교적 늦게 얻게된 인간의 능력인데 시공간 구조를 헤쳐나가다가 정보처리력이 극대화 되다 구조상 얻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설계가 된 것일 수도 있는데

“왜 그때 못그랬을까?” “왜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 에 대한 해답이 바로 여기 있다.

먼저 인간의 행동을 보아야 한다. 인간의 행동- 일단 시간은 흘러간다. 그건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시간’ 은 무엇일까? 그건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보면 일단 시공간의 시간은 존재하고 그것이 공간과 함께 대사를 하나 인간 일상계에서는 절대 시간으로 느껴진다. 라는 결과가 나온다.

역으로 생각하면 일상에서의 시간은 일상에서만 통용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사실인데 과거를 돌이키는 일이 여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현재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원자 차원에선 특정 시공간 환경속에서 시공간을 레이저로 굴절시켜 과거나 미래로 왔다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성상태에선 힘들고 그조차도 ‘지금부터’ 만든 과거로 돌아갈 수가 있다.

그런데 그런 일상중에 구성체를 유지하고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은 더더욱 힘들고, 차라리 “내가 왜 그랬을까?” 를 본질부터 알고 앞으로 안그러는 자세를 갖는게 더 낫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그런 잘못된 부분을 고쳐나가 성공을 한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본질적으로 “왜 그랬을까?” 를 아는게 중요하다.

인간은 일상에서 왜 “자유 의지” 가 제한 되는가.

한가지 측면으로는 주변이 작용하는 힘과 자기의 힘 때문이고 다른 측면으로는 시간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여기에 필연적으로 “인과” 라는 것이 개입한다.

그 “인과” 라는 것은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사건에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인데 그것은 다시 말해서 “인간 사이에 정보가 오가고 개개인으로써는 두뇌 정보처리” 이다.

물론 그것으로 인간에겐 중요하도록 설계가 되었거나 진화되었다.

 그러면 다시 생각해보자.

시간은 절대적으로 간다. 인간 일상계에서. 그런데 ‘자유’ 가 제한되는 이유는 ‘인과’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건 착각일 수 있다. 인과는 결과이고 원인이 아니다.

인간은 저마다의 시간을 가진다. 동시간대 좌표로 보자면 인간 제각각의 구조상, 공간상 역량차이로 나타나지만

개개인에게는 인간뇌, 신체라는 구조를 기반하여 시기별 발달 상황이 있고 이론적으로는 노화를 안하면 무한대의 시간을 가진다. 또한 개인마다 무한대의 ‘인생’ 이 주어지고 비슷한 패턴이 반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기준의 의미. 인간사가 거의 그런 식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의미있기에 그렇게 푸는 것”

일단 ‘자유의지’ 는 존재하고, 그러면 ‘자유의지’ 에 영향을 주는 ‘인과율’ 과의 관계를 보자. 그러면 그 ‘인과율’ 에 의해서 ‘자유의지’ 가 제약을 받는 상황이 나온다.

일단은 정보에 따라서, 두뇌 능력에 따라서, 성격에 따라서, 과거 경험에 따라서, 현재 주변 환경에 따라서,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고, 부호, 이미지, 언어 등에 따라서 자신의 인과에 의한 선택, 생각이나 정보데이터처리 후 선택, 습관 반사신경 반응, 자유의지 선택 등 ‘행동’ 으로 이어지는 아웃풋이 달라진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역량’ 이라고 한다고 보면 그 구성체 한사람의 ‘인간’ 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이세상 모든 것을 시간 구애 없이 찰나적으로 정보처리가 가능하고,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하고, 긍정적인 자유의지를 발휘하려고 스스로 자기 구조적으로 ‘선택’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단지 현재 모든 능력을 maximum 으로 만든 것에 불과한데 그러면 인간 자체가 어떤 오류도 없어지게 되고 모두가 그렇다면 정리된 세상이 된다.

반대로 모든 것이 최저라고 보자. 그러면 아마 혼란 뿐인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면 현재는 어떤가? 아마 앞서 말한 두 극점의 어느 사이에 위치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모든 인간이 같다면 마치 평형인 물처럼 ‘힘’ 이 발생하기 힘들다. 그런데 단지 인간전체의 상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제각각 다 다르다.
모든 인간이 다르거나 ‘차이’ 가 있기에 마치 위치에너지 처럼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힘’ 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두뇌가 진화 과정에서 호감을 느끼는 반응, 두려움을 느끼는 반응, 보상을 느끼는 반응, 군집 성향, 동료와의 커뮤니케이션 능력, 물리적 격투 능력,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두뇌 회로나 시대 문화적 정보 해석, 그 해석력 등에 의해서 우월한 자가 나머지를 ‘지배’ 하고 그러한 ‘인과’ 는 아메바를 넘어서 개미부터 꿀벌, 초식동물과 사자를 아울러 인간에게 까지 나타나고 있다.

다시말 해서 “힘” 의 기원은 “차이” 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정도 타고난다. 그것이 바로 세상 혼란성의 근원이고 또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자유의지의 제약” 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래서 아마 제도의 개선은 이런 “차이” 를 최소화 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되는데 역시 또 남은 과제는 이런 제도가 생긴다고 인간이 아무리 좋은 제도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반작용으로 여전히 작동하는 마치 모이면 파도 쓰나미와 같은 인간 불합리한 본능화, 또 사회 정보와 만나 반응하는 “부정적인 인과율”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인간 전체적으로 ‘역량’ 이 미비한 상태로 그런 상황에서 ‘차이’ 로 인해 부당한 정신들이 부당하게 군집이 되고 ‘무리’ 를 형성하여 시공간의 헛점을 활용해 물리로 세상을 장악하여 의인을 죽이고 씨족을 널리 퍼뜨려온 역사가 인류역사의 과거인데 발달된 인간이 보기엔 상당히 부끄러운 역사라 할 것이다.

또 인간에겐 “자유의지” 가 있다. 이것도 당연히 부당하게 돌아갈 수가 있고 긍정적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데 이게 부당하게 합쳐지면 또다른 부당한 연쇄 쓰나미 부정적인 인과율들과 합쳐진다.

그래서 자꾸 흘러온 인류 사회의 ‘업’ 이 끈임없이 인간 사회를 괴롭히는 것이다. 아동학대, 범죄, 학교폭력, 빈부격차 등…..

그러면 일단 인간이 “자유” 를 획득하기 위해서 제일먼저 거쳐야 할 것은 “힘” 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 아무리 자유의지가 확실하고 자기 자신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한들, 그런 식으로 이미 다양한 힘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어떤 현자나 의인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역사를 보면 의인들이나 능력자들이 만들어온 역사가 아니다. 대다수가 운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부당하건, 인간의 부당한 본능을 자극하였든 “힘을 얻은 자들” 이 만들어온 역사이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양분자체도 그렇다. 초점은 ‘재산의 분배’ 였지 도덕에 따른 분배가 아니였다. 애초에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속에 시작이 잘못되었고 그렇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다양한 “힘” 인간 군집들이 비대해진 것이 현대 사회이다. 그래서 원래 이상적인 기대치가 100이라고 본다면 30~40 에서 머무르고 있다고 본다.

긍정적인 것이 20 이라면 물밑 빙산은 80이다. 여전히…

그래서 그런 “힘” 을 극복하는 것-과거 원시 부터 전통적인 방법은 군사였다. 그러나 무기의 시대가 도래하고 현대에는 무기가 힘의 균형을 맞춘다.

또한 심리전이나 전략도 무시할 수 없는 한축이다.

그러나 개인의 힘으론 ?특히나 부당한 것에 호소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한 자들은- 번번히 그런 군집의 힘에 당하므로(욕심에 눈을 가린 부당한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는 도덕적이고 정당한 전략은 더이상 전략이 아니니까) 아마 그나마 현대 사회의 깨끗함을 가져온건 무기 과학의 발달이라고 본다.

어쩔 수 없이 폭력으로 기대어 있다고 하나 그나마 원시 창칼로 인한 폭군의 시대를 마감시킨건 시민의식의 발달이였고 궁극적으로 반란없이 현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건 사실 무기와 책략, 시민들에게 이양된 앨빈토플러님이 말했듯이 정보권력이다.

현대에는 심리기반 다양한 힘이 존재한다. 또 물리력의 힘은 많이 그 영역이 줄어들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 “힘” 에 관한 것은 많은 실용서들이 말하고 있으므로 이만 줄인다.

사회 문화적인 것들은 일상에서 자기의 자유를 제한 하는 것들이다-부모의 윽박지름, 감금, 학교, 공권력 등 필요악도 있지만 부당한 측면도 많다. 예를 들어서 그렇게 무리를 지어 국민들을 지배하면서 불합리한 제도를 강요하는 그런 식의 일들은 분명히 잘못 되었다고 판단한다.

3)인간내적(근본작동적)

인간의 자기 작동의 측면이 있다. 말하자면 자기의 인과를 다룸으로써 ‘인과율’ 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자유의지로만 작동하는 것인데 그러면 인과를 상당히 초월한다 그걸 지속하면. 특히 일상계에서 이미 경험적으로 그렇게 굳은 의지로 관철시킨 사람들이 많다. 그것도 유전성분이나 체험등 인과가 받쳐주면 더 수월하게 될 수 있긴하나 심지어 그런 소양이 하나도 없어도 가능한 그런 사례를 확인했으니 그런 ‘순수 자유의지’ 란 성립하고 그런 판단대로만 스스로가 작동할 수 있다.

밖에서 그런 두뇌에 대해 상대적인 “힘” 자극 들이 들어 오는데 그것이 단지 심리차원의 것이라면 구성된 뉴런의 강도도 중요하고 내성이나 저항도 중요하겠지만 그런 것들이 인간 일상 인식 차원에선 그런 성격이나 그런식으로 나타나고-보통 어릴때는 자기를 잘 모르는 게 불행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이 취약할 수 있으나 그런 어린 애들이 강해질 수 있도록 평등하게 만들 수 있게 온 아이들을 대상으로 국영수 이전에 마음공부를 먼저 시켰으면 좋겠다. 도덕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마음을 열고 1:1 전인격적인 교육을 했으면 한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이고 특히 자본주의 환경에선 인성이 좋으면 오히려 피해자로 타겟이 되는 경우까지 있기 때문에 그런 환경을 시민들이 만든 정부인 민주주의 정부가 스스로 책임을 져야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 취약성으로 자기와 외부 상황이 맞물려 일어나는 시선공포증, 도태 등을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이겨내기 힘든 경우가 많아 제도적인 근본개혁이 필요하다.

남은 과제는 앞서 말한 “힘” 들에 대해 얼마나 자유를 얻느냐 하는 문제들이고 그런 “힘” 들을 이기는 능력 - 다시 말해 “자유”를 다른 말로 치환하면 “힘” 이고 그건 자기조절을 기초로한 모든 종류의 상대적인 “힘” 을 다 포함한다. 그래서 그것이 있으면 이론상으론 전 세계 군대를 거슬러 통수권을 장악할 수 있다면 그자가 왕이 되는 것이 가능하나 그러려면 인간 전체를 좀비에 감염시키든지 아니면 인간이 다 사라져야 할텐데 그러면 자기가 ‘왕’ 인 것도 의미가 없을 것이므로 결국 그런 문제이다.

예를 들어 트럭보다 더 강하게 부딪혀도 살아남는 것이 있다면 사고는 나지 않고 물리적으로 인과에 걸릴 일은 없다 물질계에서 그런 문제. 단 남은건 그렇게 물리계 이상에서 구성된 다른 차원의 존재 가능성으로 심리와 물리를 넘어선 어떤 도덕원리가 있어 거기에 저촉된다면 문제가 되는 것일 것이다.

인간들이 아마 자유를 익히면 더 자유로운 삶을 살것

그러면 이세계는 무엇인가?

한가지 가능성!

인간 사회자체가 마치 TV를 전파로 구현하거나 컴퓨터 내에 일정한 규칙을 부여하여 움직이듯 근본이 파동=전파로 이루어진 물질이란 규칙을 가진(벽을 못뚫는등) 신의 TV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게임일 수가 있다. 성경을 보면 신이 외롭다고 그러는데 외로워서 만든 인간의 모형처럼 다양한걸 얻기 위한 심심풀이일 수 있는 것

아카샤의 기록(Akashasic Record)


물리계와 정념계


아카식의 설명에 앞서 물리계와 정념계에 대해 이해가 필요하다.

물리계란 물질들의 집합체이며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가는 계를 말한다.

정념계란 영혼(정신 혹은 정념)들의 집합체이며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계를 뜻한다. 정념계의 영혼들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고, 입증하고 싶은 본능만을 가지고있다. 정념계의 영혼들은 자신들의 본능 충족을 위하여 물리계의 생명체에 ‘송과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들과 생명체들을 연결한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체란 감정을 가지고있는 물질들을 일컫으며 정념계의 영혼들과 연결이 되었을때에 비로소 ‘생명’이란것을 가지게 된다.

아카식(The Akashic) 이란?
이르니아의 세계에선 아카식이란 것이 존재한다. 아카식이란 쉽게말해 하나의 공간단위 이다. 여기서 공간단위란 시,구,동같은 명칭적 혹은 지리적 단위가 아닌, 공간 자체의 단위를 뜻한다.



아카식은 정념계의 부수적인 현상이며 효과이다. 왜냐하면 정념계의 수많은 영혼(정신 혹은 정념)들은 마치 블랙홀과 같은 강한 힘들에의해 뭉쳐져있으며 그 뭉쳐진 단위 하나하나를 아카식이라 정의하기 때문이다.



시공간이 없는 정념계에서 ‘뭉쳐진다’라는 행위가 가능한 것은 강한 힘들 덕분이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강한 힘에 의해 시공간의 왜곡될 수 있다.

그 실 예로, 비행기안에선 10억분의 1초씩 느리게 간다거나

지구궤도를 대략 7만4천KM의 속도로 돌고있는 우주비행사들은 시간이 더 느리게 간다 등이 있다.



각각의 아카식은 하나의 공간과 무한한 시간을 가지고있다.

그 중 시간은 아카식 레코드(The Akashic Records)에 정렬이 되어있다.

아카식 레코드(The Akashic Records) 란?
아카식 레코드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영혼들의 경험이 저장 되어 있는 레코드’라 할 수 있다. 즉, 영혼들의 경험들이 이 레코드에 기억되어 있는 것이다. 이르니아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실재론으로 본다. 시간과 공간은 이미 실재하는 것이고 그것에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운명(아카식 레코드)은 정해져있고 그것을 바꿀 순 없다.



예를 들자면, A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정념계의 A`라는 영혼과 연결되어있다.

어느날 A가 길을 가다가 바람에 의해 나무의 잎이 떨어지는 것을 봤다.

그렇다면 그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본 경험은 이미 아카식 레코드에 존재한다. 이유는 정념계에 시간의 개념이 없기때문이다.



사실 경험 이란 말 자체가 정념계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영혼들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할 수 도없는 것이고

당연히 어떤 사건이 먼저 일어났다 혹은 나중에일어났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모든 사건이 이미 정렬되 있는것 같이 아카식 레코드가 존재 하는 것이다.



아카식 하나에는 아카식 레코드가 하나씩 존재한다.



앞서 말했듯이 영혼들의 뭉침 단위 하나가 아카식이기 때문에 그 영혼무리 들의 경험이 곧 아카식 레코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 이상이 존재 할 수 없다.

사실 아카식 레코드를 ‘존재한다’ 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아카식 레코드란 단지 영혼들의 수많은 경험덩어리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카샤의 기록(Akashic Record)이란, ‘공간의 기록(Space Record)’ 이란 뜻으로서, 우주 속의 모든 것들의 움직임이 우주 공간(akasha) 자체에 기록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카샤(akasha)는 산스크리트(Sanscrit) 말로서, 공간(space)이란 뜻이다.



우주나 물질이나 원자나 모든 게 원자 입자를 이루고 있는 쿼크이고
그 쿼크의 가느다란 띠 일종의 파동.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도 원래는 형체가 없고 이 쿼크 띠의 파동인 셈이죠.

그리고 아카샤란 그 쿼크의 파동을 기록하는 물질이랍니다.^^*





 참말로, 모든 옛 일들이 공간에 기록 되어 있어서, 그것을 다시 읽을 수만 있다면, 내가 살지 않았던 때의 일들과 다른 사람들의 일들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이다.



 여기서, 모든 옛 일들이 공간에 기록되는 것은 어쩌면 과학적으로 설명하기가 좀 쉬울 수 있지만, 그 기록을 다시 읽어 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 글에서, 그 설명을 시도하고자 한다. 물론, 정교하지 못한 가설일 뿐이다.

 

산 것이든 죽은 것이든, 몸이라는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는 핵과 전자로 이루어져서, 둘은 각각 양성과 음성의 전하를 띤다. 따라서, 원자 주위에는 미약하나마, 핵과 전자에 의한 전기장이 형성되고, 전자나 핵이 활동하거나 원자가 움직이는 경우에는, 그에 따른 전자기파가 주위로 퍼져나간다.



 이 공간으로 퍼져 나가는 전자기파는 곧 자신의 움직임을 공간에 전자기파의 형태로 기록한 셈이다. 이것이 바로 공간에 움직임을 기록을 하는 원리 이다. 물론, 퍼져 나가는 전자기파는 공간에서 멀어질수록, 그 힘이 줄어 들겠지만 말이다.



현상계의 본성은 파동이므로 소리가 음반위에 기록되듯이 물질우주속의 모든현상과

사건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고스란히 아카샤라는 매질위에 기록된다고 한다.

아카샤란 '최초의 원시물질'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인데, 형이상학자들이 말하는

우주심과 같은 것으로, 이 근본질료는 우주 전체에 충만해 있으며 무한히 정교한 것

이어서 자극에 매우 민감하고 우주 공간 어느 곳으로부터의 경미한 진동이라도

그 위에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긴다고 한다.



이 아카샤의 기록을 히브리 신학자들은 신의 기록을 담은 책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기록은 이루어진다.

다만, 그 미미한 기록이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완벽히 재생 가능하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다.

 

그럼 이번에는 그 공간상에 기록된 전자기파를 다시 어떻게 재생하느냐의 문제이다.



 이를 위한 중요한 하드웨어는 바로 우리의 뇌(골)이다.



 현대 과학에서 아직, 우리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기억에 대한 비밀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기억은 우리의 뇌에서 기억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만물의 모든 움직임이 공간에 기록된다면, 생명체는 굳이 자신의 몸 속에 또 다른 대용량의 기억장소를 둔 다는 것은 비용의 낭비이며, 진화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동물들을 보라, 어미가 가르쳐 주지 않은 많은 것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그 기억들을 어떻게 떠올리는 것일까?

 이러한 사실은, 어쩌면, 뇌가 기억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의 단서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럼 뇌의 용도는 무엇인가? 옛날 과학자들 중에는 뇌를 일종의 방열판으로 생각했다고 하던데, 그 밖에 어떤 용도로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뇌를 일종의 안테나로서의 역할로 보는 것이다. 즉, 이 안테나를 통해, 과거의 기억들을 수신하는 것이다.



 즉, 과거의 물체의 움직임으로부터 발생하여, 공간에 수없이 돌아다니는 전파들을 잡아서 알게 해주는 역할이 바로 뇌가 아닐까?



 그럴듯한 것이, 뇌를 이루는 뇌신경 세포를 보면, 일종의 수많은 전기회로들이다. 텔레비전에 달린 동그랗거나 길다란 안테나를 보자. 그 안테나 주위로 전파가 지나가면 그 안테나에 전류가 발생하고, 그것은 결국, 전기 회로를 통해 화면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뇌 속의 수많은 신경 회로들 주변으로, 과거 기억을 담고 있는 전자기파들이  지나간다면, 그 신경 회로에 전류가 흐를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설명이 맞다면, 또 다른 여러 주제들이 파생된다.



 예를 들어, 그렇다면, 왜 내가 겪은 일들만을 기억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기억은 왜 떠 오르지 않는가 하는 문제와 같은 것들이다. 이 문제의 경우에는 주파수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간단히 말해서, 사람마다 발생하는 주파수가 달라서, 자신이 발생시킨 전자기파들은 자신과 같은 주파수를 가지고 있어서, 잘 수신할 수 있는 반면에, 자신과 다른 주파수를 갖는 다른 사람들의 전자기파들은 잘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다른 사람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해 내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의 답을 알아 보기 전에, 주파수에 대해 더 살펴 보기로 한다. 주파수라는 말이 나오면, 보통 같이 등장하는 단어가 튜닝(Tuning; 동조)이라는 단어가 있다. 튜닝이란, 쉽게 말하자면, 라디오에서 원하는 방송의 주파수에 맞추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굳이 튜닝 하지 않더라도, 우리 자신이 했던 일들로 만들어진 전파는 쉽게 수신하여 기억해 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전파의 주파수는 지금 나의 주파수와 이미 같기 때문이다. 한편,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마음먹기에 따라서, 튜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기억해 내기 위해, 고심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시험지에 답을 적으려고 고민하는 상태라던가, 무언가를 찾으려고 떠올리는 상태, 보통 이런 때에는 우리는 마음을 가라 앉히고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바로 우리가 튜닝 하는 때이다. 물론, 이때는 내가 한일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파수는 이미 맞추어져 있으므로, 증폭률을 올리는 것일 것이다.



 즉, 그 전파의 수신 감도를 최대한 올리려고, 다른 방해 요소로부터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음을 고요히 하고, 집중하는 것이다. 자 이제, 그렇다면, 내가 하지 않은 일들은 어떻게 떠올릴 수가 있을까? 그것은 바로 그 일을 발생시킨 주체의 주파수로 나를 튜닝 하는 것일 것이다. 어떻게 그의 주파수로 맞출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그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과장하면, 내가 그것(또는 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그것의 입장이 되어야 그것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자격이 된다.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애초에 너도 나도 다 나라면 해결이 된다. 그것을 우주심, 신, 인내천, 천상천하유아독존, 일체유심조 등 여러가지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별도로 긴 설명이 필요할 듯 하고, 어쨌든, 애초부터 나와 너의 구분이 원래 없는 것이라면, 너가 내가 되고 나도 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만, 그렇다 치더라도, 기술적인 문제가 남아있다.



 즉, 어떻게 해야 내가 네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방법이다. 그 방법은 나만의 고정된 생각의 틀(고정 관념)을 벗어나서, 그 또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고, 다양한 생각의 방법들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경험을 갖고 있다면, 나는 그 대상의 정보를 가지고, 집중을 하여 그의 입장으로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나의 뇌신경의 안테나들을 그의 입장에 맞게 튜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평소에 몰랐던 그에 대한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열린 마음이란,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는 텅 빈 생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다양한 고민과 부딛힘을 통해서, 갈고 닦아 온 생각하는 관점의 자유로움이다. 생각하는 방식의 유연함이다. 남을 배려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이해심이며, 그로부터 갖추어진 매너이다. 이러한 능력은 곧 너그러움과 사려 깊은 인품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신비로운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삶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움과 진지함에서야 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다.

정보와 자유의지 만으로 '인간에게 의미있는' 그런 선택이나-제도적으로도-그런게 가능하다
물론 인과를 벗어난 것일 수 있음->말하자면 우주창조처럼 인간은 '힘과 구조물' 을 기반으로 창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힘과 역량의 미비가 있을 뿐이지.

아마 그선택을 하건 이선택을 하건 고립된 여기선 외부세계에 영향을 안줬을 것이다-이걸하건 저걸하건 대다수에 영향도 안주고 밖에선 각자 뇌구조상 비스무리하게 충족하고 살았을 것이고- 그러므로 '인과' 란 허상 그냥 자기충족으로 펼쳐지는 인간 뇌구조상 충족들인 만들어가는 인생이였을 뿐이다. 인과는 뇌나 인간 당구 연쇄행동에서만 존재 대다수 중요한 일엔 영향 x-기관차엔 무영향 결정론은 허구 자기뇌구조상 충족하고 살뿐 괜히 결정론이란 바이러스, 허상 x 오류



절대성이란 무엇이고 상대성이란 무엇인가

“우주 내의 모든 것의 실존은 상대적이다.” 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이 불교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에서 절대적이기도 하고 상대적이기도 하다. 잊으면 상대적이고 그런 조건 반응이나 상품 포장지마저 추억의 절대적이라면 절대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기준이 무엇이냐 “적어도 그 사람의 생전” “그 사람에게 있어서의 의미” 에 있어서. 상대의 반응과 상관없이, 설령 사기여도 그 사람에겐 절대적 진실이다. 그리고 상대에겐 상대적 거짓일 수 있다. 이런 속성이 있다.

그래서 ‘객관적 진리’ 에서 그런 상품포장지나 상대적 물질적 환원론 관점에서 그런 두뇌로인한 조건 반응성-곧 ‘심리’ 라 하는게 절대적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 그것으로 유발된 ‘진심’ 이라는 것이 심리도 실체이고 진심도 실체인데 심리는 심리이다.

인간이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느냐 아니냐의 문제, 인간이 진리를 알 수 있는가 없는가-인간이 진리를 안다고 하면 절대적이고 없다면 상대적이듯 그런 문제가 개입할 수 있다.

원론적으로는 인간에겐 절대적일 수 있고 객관적 진리를 추구한다면 상대적일 수 있으나 그게 결과적으로 ‘주체’ 가 없으므로 절대적 진리란게 인간 인식에만 유의미할 수 있다. 마치 어항속 금붕어 처럼.

심리를 조작하는게 옳은가, ‘진실’ 로 사는게 옳은가. 어떤자에겐 상대적 진실이 누군가에겐 절대적 진실. 그래서 ‘진심’ 으로 한다고 해도 생존에 불리해지는 경우가 많다.

복잡하게 진화한 두뇌와 그간 진화역사의 반영과 시공간(시간은 일방 흐르고 공간은 조작가능-그리고 그걸 연속선 안에서 ‘변화’를 인식하고 ‘시간’ 이 지나도 공간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울을 통해서도 확인한다.) 두뇌몸체로 이루어진 인간 작동의 특성상.

생존에 불리하다고 진실을 감추는 것이 선인가? 인간 머리가 그런 부분 구조가 있어 어쩔 수 없다. 절대적 선을 추구해도 인간 자체가 선해질 수 없으므로 신이 있다면 의미있겠지만 없다면 무의미. 단지 생존이 선이고 이렇게 진화한 자연이나 인간 유전자를 탓하는게 옳다.

자의에 의해 태어난 것도 아니므로. 자유의지를 획득하여도 지난 인생이 안바뀌듯이 변하는건 없다. 다만 ‘지금부터’ 인데 지금부터도 말이다.

달라지는건 없고 경험론 이전에 전체를 보면 진실이 보임-미비한 현실처럼 현주소와 근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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