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6일 일요일

적멸비기란 무엇인가.

안녕하세요. 이책은 제가 세상을 통해 깨달은 점을 정리한 책입니다. 누구나 “(내가 살고 있는)이 세상은 무엇일까?” “나는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해야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한번 쯤 가져보았을 수 있는데 저는 이것을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백퍼센트 맞다고는 볼 수 없지만 최대한 진리에 가깝게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대학이나 대학원 과정에서 새로운 학문을 신설하여 다루어야 하는 부분들도 있지만 그건 이시대나 당대, 적어도 후대나 먼 미래에는 꼭 밝혀질 것이라고 보고 그냥 적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해결해 줄 수도 있겠지요.
현재 사실과 틀린 부분도 있을 수 있으나 최대한 정확한 사실과 진실을 담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에 읽을 필요 없이 그냥 성경책이나 잡지에 필요한 부분을 찾아서 보듯이 자신이 필요한 곳을 찾아 읽거나 유용한 것만 읽어도 좋은 단락별이나 챕터별이나 쪽수별로 나누어진 그런 마치 (비견은 안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책이나 백과사전 같은 것입니다. 제가 최대한의 노력으로 깨달은 것이니 같이 공유하고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들어가면서
사람은 죽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죽는다는 것’ 을 생각한다는건 중요한 부분입니다. 태어나는 것은 뜻대로 태어나지 않았으나, 살아가면서 자각한 인생이란건 죽는 것도 뜻대로 죽든, 뜻대로 죽지 않든 대비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상당히 많은 진리를 보여줍니다.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중요한 건지… 아마 원하는 많은 것들이 꿈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과거 역사적 어느 무작위 시점들에서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그런 정신과 인식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많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해답은 책의 끝을 벗어나 남겨두겠습니다...... 개인적인 신념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사람이 생존하는 70년을 일수로 계산을 해본다면 2만일 남짓입니다… 사람이 나로서 살면서 일상이 길어보이고 상당히 오랜 시간을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매일 무엇인가를 하루 한번 하더라도 2만번 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2만번이나 할 수도 있고요. 그러나 그 후엔 영면, 영원한 수면을 한다는 것에서 보면 상당히 유의미한 시점입니다. ‘현재 나자신’ , 그리고 이 지구라는 이곳은요.
한가지만 해야 되는건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어쨌든 2만일 입니다. 그것이 안타깝지만 현재로선 전부입니다.
그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철학은 ‘행복’ 다소 추상스럽지만 모든 미디어와 인간의 무의식과 역사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추억이 되는 어떤 것들… 그것이 사람에겐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문제는 인간의 역사에서도 그랬었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것, ‘당대’ 를 본다면 현대 사회의 환경들이 그런 추억이 되는 것들을 방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의 개선은 당대에도 개선을 하고, 그런 자세와 실제 행동을 하는 지혜와 끈기를 후대가 이어받아야 하겠지요.
인간의 행복이란게 철학처럼 거창한게 아닙니다. 사실은 사람 개개인이 느끼는 그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 방해하는게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방해가 아니겠지만 어떤 사람에겐 크나큰 중요 저해요소처럼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광범위하게 사회 문제가 되면 법으로 제정되기도 합니다.
저는 “사소하게 여겨지지만 행복을 저해하는” 그런것이 길거리 시비, 성추행, 여성하대, 시선, 언어폭력 같은 것들이라고 봅니다. 사회 이슈가 되는 층간소음이나 악플 같은 문제도 그러한 것이지만 특징은 “배려를 하고자 하나” 당사자들에게 마음의 구조적으로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게임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둘이 협력하면 과자를 똑같이 나누어 먹을 수 있는데 둘이 협력하지 않고 혼자서만 과자를 먹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성적인 욕구가 본능적인 욕구 충족만큼 뇌에서 강렬한 보상을 일으킨다면 나누어 먹을 것이고, 그걸 남에게 주면 뇌에서 강렬한 보상이 된다면 광범위한 성적행동보다 더 자선이 널리 퍼지게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진화건 창조건 인간은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현재는. 유전공학을 통해서 DNA를 재편하거나 꾸준히 노력하여 후대에 그런 유전자 조합을 최대한 만들어 내려는 노력을 할 수도 있지만-사람은 생식이전에 활성된 DNA가 자식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부러 창조주가 그런 본능적인 욕구를 이기고 이성적인 행위를 하라고 디자인을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가 약탈과 피로 얼룩이 졌는데 그와 동시에 시공간 안에서 물리, 정신적으로 자기를 지키려는 것들이 많이 발달을 하게 되고 권력이 발생을 하였으나 주객이 전도된 일도 많습니다. 원랜 행복을 위해서 하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싸움이나 소유 그자체에서 보상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지구상이라는 구조상 그러한 것들이 미래를 담보하므로 뇌가 그렇게 바뀔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알면서도 바꾸지 못하는 것, 그게 인간의 딜레마이고 특히 법이 추구하는 방향이 되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살건 저렇게 살건 어쨌건 죽습니다. 그것이 앞서 말한 것을 더 확실하게 해줍니다.
그냥 살아도 되지만 목적이 있으면 배의 방향키가 됩니다. 레이더와 운전실력도 필요하겠지요.
*여담이지만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귀신으로 남을까요 그냥 사라질까요? 우주는 아직 밝힐게 너무도 많습니다. 원자를 쪼개고 쪼개니 결국 파동이 남았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무조건 창조가 아니라고 할 수 없지요.
어쨌든 정리해보겠습니다. 인생은 한정되어 있다. 행복을 추구해야 된다. 그러면 중요한게 무엇일까요? 효율성입니다.
시간관리의 효율성도 중요하지만 생각의 효율성, 행동의 효율성도 중요합니다. 실수가 웃음이 되기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들기도 하므로 ‘실패’ 라는 것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실수를 하지 말고 ‘인과’ 라 하는 것을 잘관리하는게 중요합니다. 운도 실력입니다. 사람마다 주어진 운이 다릅니다. 그것은 태어날때 불평등과 같은 것입니다. 살릴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는건 사실이고, 노력해서 개선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지만 친구가 되고 안되고에는 다양한 원리가 작동하고 의도치 않건 의도하건 잘되기도, 못되기도 하는데 분명한건 주어진 운이 적어도 그걸 백퍼센트 살릴 수도 있고, 주어진 운이 많아도 못살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상당히 복잡합니다. 저마다 자기가 맞다고 살아가고…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잘못 진화된 인간의 부정적인 본능, 혹은 신의 테스트로 참으라고 만든 부정적인 본능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어도 그것은 잠재적 악입니다. 칼을 요리에도 사용할 수도 있고 살인에도 사용할 수 있다고 유용하다는 비유와는 근본구조적으로 틀린 문제입니다. 선악은 있습니다. 확실히. 그건 분명하고, 인간이 공동체 진화를 위해 도움되는게 선, 그렇지 못한게 악이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으나, 좀더 넓게 보자면 선과 악에 관한 진리는 인식자 때문에 존재합니다. 인간이 인식하기에 원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없으면 절대적 선과 악에 대한 담론도 무의미합니다. 다시말해서 인간은 현재 있기 때문에 선과 악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게 상대적이지만 기준점은 인간입니다. 인간이 없다면 모든 논의가 필요가 없습니다. 우주는 자기의 생존의 뜻을 뚜렷하게 아직 인간에게 요청하여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능화로 반영시켰을 수는 있지만요.
저도 이런 것을 깨닫기 전의 삶은 일반적이었습니다. 실수도 많았고 당한적도 있고요. 한번은 자고 있는데 유리창이 깨지고 돌덩이가 날아온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살았는데 운이 좋았다고 봅니다. 다만 그 후에 대비를 하였을 따름이지요.
이렇게 원하든 원치 않든 복잡화하여 인과로 진행하는 세상에서 항상 대비란 중요합니다. 주식투자와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주식 시장은 어떻게 될지 보통은 알기 힘듭니다. 그런데 거기도 원리가 있고 시나리오에 따라 대비를 하면 상당히 승률이 높아집니다. 그것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은 인간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예를 들어서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이 우주선이 되어서 우주를 날아가기가 힘듭니다. 인간은 인간의 행동이 있고 세상은 세상을 사람구조로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당연히 세상살이에 유리한 그 방법이 있는데 세상살이가 유리하도록 이책은 알려줍니다.
물론 도덕도 필요합니다. 앞서 말한 게임이론 처럼 서로 배려하고 협력한다면 살기 좋아지는데 그걸 인간 진화적 생물학적 구조로, 자유의지(인간은 ‘깨달은 후’ 부터 자유의지를 가진다고 봅니다. 다만 자유의지 자체를 얻는 것에도 인과가 개입될 수 있습니다. 그럼 그게 무슨 자유의지냐?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저도 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어쩌다 보니 인간은 반인반수 프로메테우스가 되었습니다.) 로 어기니까 법으로 금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법도 처벌보단 예방을 위주로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살인을 한 범인을 잡아야 점수를 받는 것이 아닌 살인을 막아야 점수를 받는 형식으로 법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처벌 보단 예방위주로 바꾸어야 하고 제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도 인과가 개입했을 수도 있고 또 제 의견으로 법체계가 바뀌는 것도 인과가 개입할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깨달은 후에는 바뀌고 실수와 과오를 겪고 개선하는게 인간의 인생이고 인류의 역사였다는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살아가는게 옳다고 봅니다. 국가든 인간이든 필요한 문제입니다.
동물은 생각이 짧을 수 있지만 인간이 느끼는 감정부분은 동물도 느낍니다. 그래서 동물보호법 같은 것도 존재하는데 영역이 점점 확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동물도 구조가 상당히 유사합니다.
<행복을 저해하는 것> 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그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왕따와 일본의 히키코모리 현상일 것입니다. 한국에도 상당히 사례가 많은 것으로 보고 있고, 왕따와 히키코모리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인과의 결과로 일어난 심정적인 상태가 동시대 현대인들의 내면구조와 같습니다. 말하자면 현대인이 안고 있는 불안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는 사례입니다. 누구나 왕따나 소외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뒤처짐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또 미래에 대해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자기보호 심리가 발동합니다. 과거에 그런 일을 겪었기에 미래가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자기보호입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알 수도, 모를 수도 있지만 이런 (복잡한 논문과 철학으로 다루는) 큰 사회현상도 아주 사소한 이유에서 시작합니다.
그 이유를 볼까요? 초등학생 왕따 이유는 그렇습니다. 못생겼다, 가난하다, 냄새가 난다, 말이 없다, 그냥 싫다, 느낌이 싫다,… 등 가지가지 입니다. 그런데 중학생, 고등학생, 어른은 성숙할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왕따시키고 방관하고 당했던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노화를 하면서 성인이 됩니다. 성인이 되어 자기를 방어하고 논리가 생기고 하는 일은 달라지지만 근본구조는 다르지 않습니다. 동일합니다. 다만 그것이 나쁘다고 반성하거나 겪고 생각하고 느낀 사람들이 나중엔 왕따를 반대합니다. 그것이 그때만 그러든 나중에는 왕따에 동참하든 왕따를 막는 행위는 옳은 것입니다.
(개인입장의 ‘인생’ 이란 그런 노화되는 생물체인 ‘자기’ 의 뇌가 공간이란 곳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움직이고 두뇌대사가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의 정신에선 온갖 느낌이 일어납니다. 구성된 정신에선 스스로의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일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것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구성된 ‘정신’ 이것이 인간의 양면성입니다. 하드웨어가 소프트 적으로 구현되는 컴퓨터와 닮아있습니다.)
문제는 일부의 문제가 아닌 왕따를 시키는 사람, 방관무리, 피해자가 안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현대인의 문제로 인해서 구성원 제각각의 행복을 저해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무배려’ 입니다. 이기주의, 본능충족만을 위한 욕구 추구, 쾌락과 뒤틀린 상품화로 사람을 대하고 그것을 방관, 장려하는 자본주의,무관심, … 그런 것들입니다.
나살기도 바쁜데… 가 아니라 그것을 함께 해결하면 후에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는 일들을 막아내는 많은 시간들을 벌 수가 있게 됩니다.
소송, 싸움, 왕따(이것은 누구나 자신이 언제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직장에선 돌아가면서 피해자가 되어 무려 70%의 사람들이 왕따를 한번이상 겪게 되는데 이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문제입니다. 단지 자기와 유전적인 냄새, 성분이 안맞는다는 이유나 다른 인식이 받아들이기에 잘못받거나 소통상에 여러 문제들로 왕따를 시키고 그것은 그런 쪽수등 ‘힘’을 가진 자는 누구나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현대인은 죽을때까지 그런 환경에 처하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층간소음, 길거리 시비, 싸움, 각종 범죄,… 더나아가 인류의 전쟁도 무배려에서 비롯된 문제입니다. 본능에서 비롯된 이기주의적 충족 욕구와 그런 시도에서 비롯된 문제입니다. 하자고만 해선 그간 역사를 보았을때 힘들 다는 것 압니다. 자발적으로 하게 하려면 사실은 인간의 두뇌를 바꾸어야 하는데, 만약에 그런 상대를 배려할 때 성적인 이상의 보상충족을 느낀다면 현대 어그러진 성적인 극단적 쾌락추구 처럼 많이 퍼지고 다들 하겠지요. 한번 신께 건의해보고 노력해보아야할 문제입니다.
*산에 올라가 도시를 보면 보일때가 있다. 사람의 사는 것이란.
사람이 작아보여도 인간 뇌구조의 특성상 누구나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다만 필요한건 있다.
인간의 부정적 구조의 실체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그것은 본능뇌의 일들- 대학생이 중고등학생들과 동네에서 시비가 붙은 사건이 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중고등학생, 자퇴자들이 동네 선후배까지 다 공유하고 끝까지 만나면 모욕을 하고 집까지 찾아가서 보복하는 등 재미를 추구하다가 점점 중독되어 동네에서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런 것을 보면 상당히 불합리한데 불합리한 뇌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건 동물의 작용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람성’ 이 발달한 존재다. 그러므로 그건 사람성이 생겨난 이유가 무엇이건 본능을 다스려야 할 책무를 동시에 지닌다. 그건 질서유지와 공동체 유지를 뛰어넘는 어떤 것이다.
누구나 짐승일때, 인간일 때 모든 인간이 거의 그런다. 제각각 차이는 있지만 인과가 반영된 뇌구조적인 문제이다. 사회도 중요하나 결국 그 행동을 하는건 인간의 뇌니까.
또 그 동물의 작용중 ‘조건반응’ 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은 신호에 반응한다. 말하자면 뇌가 진화적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대로 상당히 불합리한 반응을 한다. 똑같은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마음에 들면 친해지고 마음에 안들면 안친해지는 것이 대표적인 것이다. 왜 그럴까? 그런데 안친해졌다고 해도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친해질 수 있다. 거기에는 사회심리학적인 이유가 있다. 진화심리도 개입한.
다 인간의 구조가 만든 것인데 조건반응은 상당히 지속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게 범죄를 일으키는 근본구조가 된다. 만약 인간이 이런 구조가 아니라면? 그런 행동도 나지 않았을 것이고 ?법이란게 ‘그 개체’ 를 처벌을 하나 그건 사실 일관성과 관련이 없다. 착한 사람도 ‘그 행동’ 을 하면 처벌당한다. 일관성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데 모든 인간에겐 조건반응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잠재적인 범죄의 소양이 있다는 것이다. 선사시대엔 타살이 일반적이었는데 그중에 살아남은 살인자들의 후손이 현대의 인류이기 때문이다.(‘인류의 역사’ 인용)-
이런 부당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 역시 처벌이 능사가 아니다. 반 학생을 왕따 시켰으나 좋은 대학에 진학한 자가 있다. 그런데 생활기록부에 기록하여 응징을 하기 이전에 왕따를 막지 못하면 관리감독의 책임이 있는 사람(선생님)에게 관리감독의 책임을 물을 순 없었을까. 아직 사고가 미비한 어린 ‘방관자’ 학생에게 책임을 묻기 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데 방관하는 것이 더 나쁘다. 순자에 모르고 하면 ‘오’ 이고 알고서 하면 ‘악’ 이라는 말이있다. 선생님에게 책임을 물려야 한다는 것은 나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스웨덴에서 시행하는 정책이다. 왕따를 막지 못하면 벌금을 모든 선생님이 그렇지 않다는건 알겠지만 학창시절 왕따를 방관한 선생님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모든 선생님들이 신이 아니다. 혼자서 하기 힘들다. 그래서 더 큰 집단인 ‘국가’ 가 개입해야 한다. 이것은 왕따의 사례를 들어 예기 했지만 모든 부분의 교육에 대해서 책임은 국가에게 있다.
이런 부당한 조건반응이 만든건 또 ‘기수열외’ 가 있다. 여러가지 조건반응적 이유로 고참들이 떨어지는 동기를 후임들도 대우를 해주지 말라고 하고 괴롭히는 것인데 만약 그런 조건반응이 없었다면 부족하든 잘하든 똑같이 대우했을 것이다. “고문관” 이라는 것은 합리화이다. 당연히 군대니까 떨어지는 자가 있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은 관리의 문제이다. 고문관은 따로 모아 관리를 해야 한다.
사람에게 죄를 물을 수도 있지만 사람은 사실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 동물이다.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이 다른 정신을 가지게 만든다. 그래서 환경을 조절하고 다루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고, 손자병법의 전략 운용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국가란 항상 전략을 가지고 매사를 다루어야 한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 을 안만들겠다는 진심 그것이 세상을 바꾼다.
길거리 폭력, 학교폭력, 성폭행 등 인류의 부정적인 문제는 일단 1.본능이 저절로 그렇게 나오는것 2. 중독, 정보의 부추김등 강화되는 것 3.그걸 막을 브레이크가 없는 것(특히 대부분 인간은 브레이크가 없을때 계속 폭증된다) 4. 그걸 막을 최후의 브레이크인 가족과 종교따위가 붕괴되어 가는 것 전체사회적으로 가르쳐야할 선배라는 것들이 사회 주도층까지도 누구하나 도덕을 책임지고 통제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 그런 기관[체계시스템]이나 제도체계가 법은 미약하고 구석구석 닿지 않고-그런 자들 조차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에 할 수 없는 자멸 할 수 밖에 없는 이미 태생적 한계로 인간은 짐승과 인간을 한곳에 갖추었단 사실만으로 자기모순성을 가지고 프로테우스처럼 인생을 허투루 살며 자멸할 운명을 타고 났다.
진정으로 속으로 양심이 있는자, 그럴때가 적어져 가는건 사실이다.
*인간의 “뇌” 그것이 문제로다. 인간은 물질인가 정신인가? 그런데 뇌라는 것이 물질로도 마비되는 물질이긴 하지만 그게 구성된건 정신이라고 한다. 물질이 반영된게 곧 정신이다. 마치 컴퓨터 생각하면 될 듯. 다만 육신에 가깝고 뇌에 가깝고는 있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건 다양하게 나타나건 그것이 악을 부르진 않는다. 몸에 가깝건 정신에 가깝건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다.
*실제 물리로 이어지면 명확하나 인식적인 심리는 그렇다. 바닷물에 소금 한줌 뿌린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 한줌을 먹으면 짜다. 그런 상대적인게 있다. 검은 종이의 검은 점은 티가 잘나지 않으나 흰종이의 검은 점은 티가 날 수 있다.
*세상의 부조리를 단적으로 드러낸 글을 보겠다.
나는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만
인간들이 나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오히려 피해받고
짓이겨지고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다 보았다.
작은 행복마저 짓밟고 무시하고 조롱했으므로
나는 내게 그 가래침을 뱉던 인간들을 올바른
세상을 위해서 응징하였다.
그리고 착하고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푸른 하늘을 보며 맑게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법이 해줄 수 없고 오히려 정치가들은 더
악하므로 나는 스스로 세상을 멸망시키는
악마를 대신하여 복수를 하였다.
그것이 내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만약 착한 사람들이 당하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고 집앞 개천에서 가난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나는 다른 사람을 해친다는
생각은 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우리에게 가래침을
뱉고 경멸하며 술을 먹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해친다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얼굴이 못생기고 돈이 없다고 무시하는
얼굴과 막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착하고 선량한 인간이 가난한 행복을 누리며 살수 있는
세상이 정상인데
악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려는 사람들만이 거리에 마음껏
돌아다니고 물장구를 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세상을 깨끗하게 뒤바꾸기 위해 인간클리너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모두 없애고 예의와 도덕이 살아있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내가 심판의 악마로 대신하여
이 세상에서 사라질 지라도 그러고 싶었다. 나는 행복을
놓쳤지만 나를 닮은 약한 사람들은 행복을 마음껏 나눌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것이 인생의 전부였다.
개같은 우주를 자폭시키겠다.
*정당하든 안하든 그것의 이미지를 보고 판단하는건 조건반응이다. 그런데 정당성으로 판단하는건 합리적이다. 그래서 여론 재판이든 공권력이든 감정적으로 하는건 부당하다.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 복을 받는 세상이 아니다. 그래서 아직 진화역사로 미비한 그점을 시스템과 제도를 통해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선행을 하면 돈을 주게 된다면 세상은 선행으로 넘쳐나고 그것이 가식이든 자기 이익이든 내면이 썩지만 않는다면 조작하지 않는다면 어쨌든 살기 좋아질 것이다.
*기독교의 잘못된 폐해가 있다. 어린시절부터 비현실을 주입하여 세상의 인간 행동을 곡해하게 된다. 인간이 동물이기에 동물 행동을 동물 행동으로 해석해야 되는데 그것을 죄라고 해석하고 자신을 정죄하며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게 만든다. 혼자힘이나 기독교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면 사도행전에서 바울도 죽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안죽었을 것이고 현재도 세상이 깨끗해졌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는 것은 세속적인 전쟁을 거쳐야 한다.
*가난한 행복이 짓밟히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람마다 주어지는 행복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인식에 의한 차별로 인해서 그것이 줄어들 뿐이다. 누구나 마음은 비슷하다. 누구나 좋은 걸 누리고 싶다. 다만 외양이나 여러 조건들로 차별받는 것이다. 인간이 조건반응적으로 인식한다는 자체가 재앙이다. 인류 자멸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인간끼리의 이기주의, 짐승.
*짐승과 다를바 없는 공유하는 부분. 그것이 인간을 파괴한다.
*똑같이 혼내도 사랑의 유무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이다.
*어릴때는 힘이 미비해 부모에 좌지우지 될 수 있다. 그래서 특히 아버지쪽의 폭력으로 좌절한 많은 천재를 알고 있다. 대다수의 교육은 아버지가 망친다.
*남자와 여자의 진화적 불합리성과 악성은 비슷하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 통계를 보면 인류의 전체 살인자의 90% 가 남자이기 때문에 실행과 행동으로 옮기는 남자, 그것이 문제라고 보겠다.
*왜 사과를 해야하는가? 죄책감이나 뉘우침 사과도 안한다고 하는데 자기들은 평소에 불쌍한 사람한테 경멸스런 표정과 감정으로 자기 쾌락만 추구하고 동전하나 안넣으면서 누가 누구보고 사과를 하라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히려 그런 세속적이고 돈과 쾌락과 본능만 추구하는 속물들보다 어린시절 더 도덕적이어서 트라우마가 크게 생겼을 뿐이다. 이 세상 속물들 정신이 도덕관념없이 돈과 외모, 쾌락위주로 그렇게 돌아가니까 도덕적인 인간이 충격을 받고 그렇게 사는 방식을 극대화 시켜 그런 속물들보다 더나아가서 법과 도덕없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진화를 하고그들보다 앞서나가서 선진적으로 쾌락 살인을 하게 된 것인데 그런 세상 대중이란 속물들의 정신을 현실로 단지 실현시켰을 뿐이다. 대중이란 사람들은 속마음에 매일 여자 강간하는 동영상을 즐기고 술자리에서 그런 음담패설하고 여자범한 것 자랑하고 욕하면서 잔인한 말을 과시하고 즐기면서 하면서 사회적인 감정의 주고받음의 원리에 따라서 사과를 하라는게 ?그들의 룰일 뿐- 세상물정 모르는 꼰대들의 발상인지 자기들도 도덕적으로 살고 있지 않으면서 누가 누구보고 사과하라는 것인가? 도덕책이 사과하라는 것인가 먹물먹은 인간들이 위선을 떠는 것인가? 인간의 감정이란 이런 것인데 이게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도 웃긴일이다. 강한게 정의가 되는 중세의 반복일 따름이다. 아마 마녀사냥도 당대 사람들이 다 죽어 당시 사람들에겐 무의미한 일을 후대가 다른 뇌들을 가지고 곱씹고 있을 따름.
*보통 인간한테 더러운일을 체험하고 인간의 본질을 뿌리 속까지 몸으로 알게 되면 더이상 인간에게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뇌도 반영될 수 있지만 심리적인 문제이다. 힘에 의한 위계질서 본능, 그리고 성학대, 외모만으로 차별 왕따, 인간들의 비열하고 얄팍한 본성 이유없이 재미로 당한 폭력, 성폭행이 그 단적인 예이다.
*깨달음은 평생의 수고를 1년으로 단축시킨다.
*사실은 더 자극적이니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미 이렇게 진화했으니 신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은 왜 키와 외모를 중요하게 만드셨을까? 아담과 하와의 타락 때문일까? 그냥 진화로 인해서 얻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하나님도 키와 외모를 따져야 할텐데 다행히 중심을 보신다고 한다.



*어릴 때 실수 많이 할 때 부터 이 세상의 인생을 사는 법을 알려줄 위대한 메시야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인생이 그토록 불행하지 않았을텐데... 그것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본다. 현실적 구원. 인생의 사는법을 모두 알고 인생과 세계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존재. 약하고 흔들리는 사람을 사상으로 확인시켜주고 자신감을 갖게하고 굳건히서서 온땅을 장악하는 존재…어떤병이든 치료해주는 존재 인생은 돈이아니라 행복과 도움…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고 그렇게 살아가는게 맞는것이라는 것을 깨닫게해주는 존재 선한일을 하여 돈을 거두어 들이는 존재 그러나 악성의 공격에는전쟁을 하는 존재 외모가 어떻든 정신과 사상의 중요함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는존재. 그리고 굳건한 철학과 확실한 사상과 전쟁 능력을 갖춘 존재 세상을 온전하게 통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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